동남아시아/라오스

항아리평원을 보고 루앙프라방으로 가며

boriburuuu 2016. 3. 7. 01:24

 이곳은 고원지대라 기온이 평야지대와 달랐다. 지금까지 얇은 이불이라도 거의 덮지 않았었는데, 여기서는 이불을 목까지 덮고 잤다. 이곳도 라오스이며 우기이라 새벽 1시경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아침 6시경 그쳤다. 아침에 일어나 펼쳐놓았던 짐을 배낭에 챙겨놓았다.

  

 아침은 호텔에서 뷔페식으로 먹었는데 다른 곳과 달리 고구마와 잡채가 나왔다. 아마 이곳에서 생산되는 재료로 특식을 만든 것이리라. 라오스에 와서 지금까지 그랬듯이 모든 음식이 나의 입에 딱 맞았다. 대장님은 이곳 기후가 마음에 든다며 골프장만 있으면 폰싸완에서 살고 싶다고 했다.

 

일행은 버스에 가방을 모두 싣고 호텔을 출발(08:00)해, 항아리평원으로 향했다.“항아리평원(Plain of Jars, 텅 하이 힌)”은 거대한 돌 항아리가 발견된 모든 지역을 일컫는 말로 현재까지 60개 지역에서 2,000여 개의 돌 항아리가 발견되었다. 평균 해발 1,100m 고원평지에 흩어져 있는데, 총면적 450제곱Km로 동서 20Km, 남북 30Km에 걸쳐있다고 한다.

 

 연구결과에 따르면 2,500년~3,000년 전인 선사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장례의식과 연관된 것이란다. 돌 항아리 아래서 유골 등이 발견되면서 무덤임이 증명되었으며, 돌을 깎는데 사용했던 철제도구들과 청동장신구들이 함께 발견되었다고 한다. 돌 항아리유적은 60개 지역에서 발견되었지만 미비한 도로사정과 불발폭탄이 대거 남아 있어 방문할 수 있는 곳이 제한되어 있었다.

 

 폰싸완에서 가깝고 불발폭탄과 지뢰가 90%이상 제거된 대량의 돌 항아리유적이 밀집해 있는 곳은 3군데였다. 이곳에 관광객이 주로 방문하지만, 유적의 건설연도와 누구의 것인지도 명확하지 않아서 발견된 순서대로 번호를 붙여서 1번 유적, 2번 유적, 3번 유적으로 구분한다고 했다.

 

일행은 1번 유적 항아리평원방문자센터 주차장에 버스를 세우고 들어가려고 했으나, 문이 잠겨 있었다. 조금 있으니 관리자가 나와서 그냥 유적이 있는 곳으로 가라고 했다. 다시 버스를 타고 조금가자, 또 다른 주차장이 있었다. 그곳에서 유적으로 가는 흙길이 있는데, 오른쪽에는 붉은 꽃나무가, 왼쪽에는 용설란을 심어놓은 등 정비가 잘되어 있었다.

 

<1번 유적 항아리평원방문자센터 모습>

 

<항아리평원으로 가는 길에 아름다운 꽃이 있는 풍경>

 

<항아리평원으로 가는 길옆 주차장에 있는 꽃나무>

 

 비가 조금씩 오기 때문에 일행은 우비를 입거나 우산을 쓰고 유적을 찾았다. 얼마가지 않아 언덕 정상에 돌 항아리가 보였다. 1번 유적(텅 하이 힌 능)은 폰싸완에서 가장 가깝고(10Km) 규모도 가장 크며 모두 334개의 돌 항아리가 있었다.

 

 언덕 제일 높은 곳에 있는 항아리평원에서 현재까지 발견된 것 중 제일 큰 돌 항아리인“하이 째움(Hai Chaeum 째움 항아리, 높이 2.5m, 무게 6t)”이 있었다. 이것은 당시 이 지역에 평화를 가져온 군주(째움)를 칭송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일행은 이런 유적을 생전 처음 보는 것이라 비오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마음껏 추억을 남겼다.

 

<언덕 위에 있는 항아리평원 풍경>

 

<현재까지 발견된 것 중 제일 큰 "하이째움(째움 항아리)" 모습>

 

 

 언덕 밑 평원에도 많은 돌 항아리가 있었다. 그것을 보기 위해 언덕을 내려갔는데, 유적에 가기 전 왼쪽에 조그마한 동굴이 있었다. 베트남전쟁기간 동안(1964~1973) 빠뗏 라오(Pathet Lao,“조국라오스”라는 뜻을 지닌 라오스 공산당)의 은신처로 쓰였던 곳인데, 침식작용으로 인해 천장이 일부 뚫려있었다. 때문에 돌 항아리를 만들던 가마로 쓰였다는 학설과 돌 항아리를 만들지 못하는 일반인들의 화장터라는 주장도 있다고 한다. 지금은 작은 불상이 모셔져 있었다.

 

<언덕 밑의 길 왼쪽에 있는 빠뗏 라오가 은신처로 쓴 동굴>

 

 들판에는 언덕보다 엄청 더 많은 돌 항아리가 있었는데, 대부분 언덕보다 작은 것이 많았다. 어떤 것은 물이 고여 있는 것도 있고, 흙이 담겨 있는 것도 있으며, 깨진 것도 있었다. 중간 위쪽에는 뚜껑이 덮인 돌 항아리 하나가 있었다. 모든 것이 뚜껑이 있었으나 세월의 흐름에 따라 없어진 것인지, 아니면 특별히 저것 하나만 뚜껑을 덮은 것인지도 궁금했다.

 

<1번 유적 언덕 밑의 평원에 돌항아리들이 있는 풍경 1>

 

<1번 유적 언덕 밑의 평원에 돌항아리들이 있는 풍경 2>

 

<1번 유적 항아리평원 주위 풍경 1> 

 


<언덕 밑의 항아리평원에 뚜껑이 있는 항아리 모습>

 


 들판의 돌 항아리가 끝나는 곳에서 왼쪽으로 올라가는 언덕 중간에도 돌 항아리 3개가 있었다. 그 조금 위에는 베트남전쟁 시, 미국의 클러스터폭탄(Cluster Bomb) 투하로 파인 구덩이 2개가 있었다. 구덩이는 40년 이상 세월이 흐르자,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나무와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언덕 중턱에 있는 3개의 항아리>

  

 <항아리평원을 지나 언덕 위로 올라온  모습>

 

<베트남전쟁 시 크러스터폭탄이 떨어진 자리엔 나무가 크고>

 

<베트남전쟁 시 폭탄이 떨저졌던 자리를 표시한 간판>

 

 베트남전쟁 시, 실제로 베트남 어떤 곳보다 라오스의 폰싸완(씨앙쿠앙)이 많은 폭탄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총 581천여번의 출격을 통해 200만t 이상의 폭탄이 투하되었단다. 이는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과 독일에 투하된 폭탄보다 많은 양이란다. 때문에 공식적인 사망자 숫자는 집계된 것이 없지만, 많은 사람이 사망했다고 한다. 지금 전 세계의 불발 폭탄으로 인한 사망사고의 50%가 라오스에서 발생한다고 했다.

 

 그러나 불가사의한 것은 이렇게 많은 폭탄이 폰싸완에 투하되었지만, 돌 항아리가 하나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것이다. 혹시 이곳에 묻혀있는 사람들의 영혼이 폭탄을 비켜가게 한 것일까. 일행은 언덕을 넘는 길을 따라 내려와서 버스에 올라 루앙프라방으로 향했다(09:30).

 

 폰싸완은 방비엥에서 루앙프라방으로 가는 길 중간에서 동쪽으로 큰 고개를 넘어서 있었다. 또한 라오스는 도로가 잘 정비되어있지 않아 삼거리까지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만 했다. 일행은 어제 넘었던 고개를 되돌아와서 삼거리 식당에서 쌀국수로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고 나도 비는 계속 내렸다. 하늘이 새는 가운데 다시 루앙프라방으로 달렸다. 여기서 다시 고개를 넘었으나, 폰싸완으로 가는 고개보다는 엄청 양호했다. 이 산에도 경사가 조금 약한 곳에는 어김없이 밭을 만들고 농막을 지어놓았다. 일행은 휴식을 취하면서, 한 사람이 가지고 온 가방과 문구를 현지 어린이에게 주고, 그들과 함께 사진을 찍기도 했다.

 

<일행이 준 가방을 어깨에 메고 포즈를 취한 현지 어린이>

 


<현지 어린이 보호자는 그것을 보고 좋아하며>

 

<현지 어린이 등과 추억을 남기는 사람들>

 

 루앙프라방이 가까워지자 비가 그쳤는데, 오토바이 행렬이 눈에 띠게 많아졌다. 일행은 숙소인 폰팽 게스트하우스(Phone Pheng Guest House)에 도착해 짐을 풀고, 유명한 루앙프라방의 야시장 구경을 나셨다(19:20). 과연 이곳의 야시장은 없는 것 빼고는 다 있는 곳이었다. 옷을 비롯해서 실내화, 지갑(수제품), 스카프, 산악 민족 공예품, 코브라 술, 지네 술 등 너무나 다양했다. 그러나 나는 아이쇼핑으로만 끝냈다.

 

 <루앙프라방의 폰팽 게스트하우스 간판>

 

<루앙프라방의 폰팽 게스트하우스 전경>

 

<루앙프라방의 야시장 풍경 1>

 

<루앙프라방의 야시장 풍경 2>

 

 

 

<루앙프라방의 야시장 풍경 3>

<루앙프라방의 야시장 풍경 4>

 

 

<루앙프라방의 야시장 풍경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