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미술관/우피치미술관

우피치 조토, 피오렌티노,파브리아노, 프란치아. 우첼로, 보카치노, 렘브란트, 볼트라피오,브론치노, 소도마

boriburuuu 2020. 12. 3. 21:18

조토의 <천사와 성인에 둘러싸여 있는 성모자>이다(오그니산티 마에스타) 1300-1305년. 예수를 품에 안고 있는 마리아는 여왕처럼 왕좌에 앉는다. 이것은 이와 유사한 주제를 가진 다른 그림들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는 "마에스타" 또는 "마제스티"라는 칭호를 낳는 우상화다. 성모님은 오른손으로 축복을 내리고 있는 아이를 안고 있는 반면, 왼쪽에는 지식을 상징하는 구른 두루마리를 들고 있다. 왕좌 주변에는 1300년대에 유행했던 고딕 양식의 건축물을 연상시키는 다른 색상의 대리석이 상감된 뾰족한 성막이 있다. 이 성막 안에는 성자와 천사들이 모여 있다. 왕좌 기슭에 무릎을 꿇고 있는 천사들은 순결과 자선을 가리키는 장미와 백합 꽃병을 제공하는 반면, 왕좌의 옆구리에 있는 천사들은 그리스도의 열정을 가리킬 것 같은 종교적 물건인 왕관과 피스를 내밀고 있다. 화가가 이미 이탈리아 전역에서 매우 잘 알려져 있고 수요가 많을 때 그려진 이 걸작은 이 전통적인 주제를 발전시키는 자연주의로 두드러진다. 의류의 장식 요소는 최소한으로 감소되어 빛과 그늘에 의해 형성되는 신체의 완전한 플라스틱 특성을 이끌어낸다. 1세기 이상 동안, 이그림은 플로렌타인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모델이었다.

로소 피오렌티노의 <류트를 연주하는 천사>다. 1521년. 어린 천사가 류트의 끈을 뽑는 이 유명한 작품은 잃어버린 제단의 파편이. 어두운 배경 아래 음악 천사는 프라 바르톨로메오 또는 라파엘의 특정 그림의 방식으로 서 있었을 것이다. 비교해서 너무 큰 류트를 다루는 그의 노력에 있어서 분명히 자신감이 없는 어린 천사의 매우 부드러운 이미지를 묘사한 이 그림은 화가가 특히 현대적인 붓놀림이 작품에 특히 생생한 효과를 주는 전통적인 주제를 재해석한 것이다.

젠틸르 다 파브리아노의 <마기의 경배>다. 1423년. 긴 여정이 끝날 무렵, 마기는 별의 안내를 받아 새로 태어난 메시아 앞에 도착하고, 그들은 소중한 선물을 바치며 성가족 앞에 무릎을 꿇는다. 세 명의 현명한 사람들은 매우 풍부하고 유행하는 옷을 입고 있으며 극동에서 온 것을 강조하기 위해 이국적인 동물들을 포함하는 다민족 행렬을 동반한다. 마기의 여정은 별을 볼 때부터 헤롯의 궁전에서 잠시 멈추고 마침내 집으로 돌아오는 여정으로, 작품의 배경에서 세 개의 분리된 에피소드로 묘사되어 있는데, 지평선의 바위 배경에 의해 함께 모였지만, 프레임의 세 아치로 시각적으로 분리되어 있다. 그림으로 장식된 꽃으로 옆면에 놀라운 틀을 장식한 이 제단은 왼쪽에서 그리스도의 어린 시절의 장면을 보여주는 프리델라로 완성된다 : 왼쪽부터, 탄생, 이집트로의 비행, 그리고 사원에서의 발표. 이 그림 자체는 부유한 은행가이자 세련된 예술 애호가인 팔라 스트로찌가 피렌체 산타 트리니타 교회의 성찬식에 있는 가족 예배당을 위해 의뢰했다. 이 화가가 서명하고 1423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 패널은 이방인의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이탈리아에서 가장 중요한 고딕 그림의 예로 인식되어 왔다. 그것은 많은 양의 금속 잎에서 볼 수 있듯이 특정 기술의 사용에 있어서 특별한 기술력을 보여주며, 부분적으로 양각되어 기병의 스퍼나 칼자루와 같은 아이템에 3차원적인 측면을 더하는 안도감을 만들어낸다. 프레델라에서는, 메디아에발 시대에 사용된 금색 배경 대신에, 그 장면들은 푸른 하늘을 가지고 있어, 자연에 대한 관심과 그 숭배의 시작을 보여준다.

일 프란치아의 <성 프란체스코>다. 1490년. 아시시의 프란시스는 종종 사적인 예배와 관련된 물건인 작은 행렬 십자가를 부드럽게 들고 있다. 그의 손은 기적적으로 받은 오상의 흔적과 보여주고 있다. 그 장면은 조용한 시골 풍경에 열려 있는 작고 사적인 환경에서 일어난다. 성자는 성 프란시스 복장을 한 남자의 초상화처럼 보이는 젊고 잘 특징지어진 얼굴을 가지고 있다. 선명한 빛은 플랑드르 그림,기도 책의 발명을 포함하는 전통과 같은 세부 사항을 분명히 설명하고 전경의 난간 위에 놓여 있다. 이 작품은 일반적으로 벤티보글리오 통치 당시 볼로냐의 예술적 장면의 주인공인 프란체스코 프란시아로 생각된다. 서예적 렌더링과 세부 사항에 대한 관심은 프란체스코 프란시아가 금세공 기술에 익숙했기 때문일 수도 있는데, 특히 젊었을 때 그가 성공적으로 연습한 예술이다.

파올로 우첼로의 <산로마노 전투>다. 1435-1440년. 이 패널은 1432년 산로마노(피사) 전투에서 시에네군에 대한 플로렌타인군의 승리와 밀라노 공작이 지도한 동맹을 기념하는 세 점의 그림의 사이클의 일부분이다. 피렌체 군대의 수장인 니콜 다 톨렌티노가 전투가 격앙되는 동안 적군의 수장인 베르나르디노 델라 카르다를 랜스로 풀어 놓는 모습이 보여진다. 플로렌타인 군대의 방향과 적들의 방향이 약간 앞으로 기울어지고 적들의 방향이 약간 뒤로 물러난 채, 전투의 결과를 예고하고 있다. 우피지 패널은 현재 런던 국립 미술관에서 피렌체 군대를 이끌고 있는 그림에서 니콜 다 톨렌티노가 현재 파리 루브르 박물관의 패널에 묘사된 미켈로토 다 코티놀라의 공격과 결별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서술 순서의 중심 에피소드다. 왼쪽 아래. 구석에 있는 통합은 오렌지 잎, "말라 메디카"또는 신 오렌지의 묘사를 보여 주며, 그것은 메디치 가족의 상징이었다. 말의 갑옷과 다리들을 보여주기 위해 파올로 우첼로는 다소 많은 양의 금속 잎을 사용했는데, 과거에는 이 그림에 풍부하고 풍부한 색깔을 주었을 것이다. 우첼로는 원근법의 거장이었고, 리오나르도 바르톨리니에 속하는 궁전의 패널의 위치 때문에 바닥에서 관점을 취할 수 있는 단축된 몸의 건설에서 이것을 보여준다.

파올로 우첼로의 <성 모니카와 기도하는 두 소년>이다. 1430-1435년.  성자는 보통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어머니인 모니카로 생각되는데,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랑과 기도를 통해 기독교로 개종했다. 그녀의 검은 예복은 머리와 목을 덮는 하얀 위플과 함께 수녀의 예복과 같지만, 모니카처럼 대개 미망인들도 입었다. 이 성자에 대한 숭배는 1430년 오스티아에서 로마로 유적을 옮긴 후 이탈리아에서 특히 증가했다. 모니카는 작은 십자가, 순환 전조, 기도할 때 사용되는 구슬을 들고 있다. 그녀의 발치에서 두 아이가 손을 모아 기도하고 있다. 왼쪽의 물체는 천사가 들고 있는 악기의 손잡이, 또는 다른 성자를 식별하는 속성의 파편일 수도 있는데, 아마도 성 베드로 마티르가 살해된 칼일 것이다. 왼쪽 아래에서 볼 수 있는 어두운 가운은 아마도 도미니카 수도사인 세인트 피터 마티르의 우상화로 식별될 수 있을 것이다.

까밀 보카치노의 <늙은 남자의 초상>이다. 1630-1640년.  이 작은 그림은 성인과 철학자의 우상화 기준에 따라 묘사된 노인의 머리를 초상화로 연구한 것이다. 피실험자의 대머리와 긴 흰 수염은 사실 이러한 캐릭터의 전형적인 속성일 뿐만 아니라 굽은 어깨와 아래쪽을 향한 눈이다. 이러한 특성은 명상, 회개, 영적 또는 지적 반성의 태도를 내포하고 있다. 그 인물의 자연주의적인 렌더링은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시청자가 거의 실제 촉각적인 감각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머리카락이 없는 머리의 부드러움, 이마와 눈 주위의 약간의 주름, 면모의 일관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수염의 부드러움, 그가 입는 겸손한 천의 거칠기를 감지하는 것 같다. 특히 중요한 것은 색과 빛의 사용이다. 이 그림은 영리한 키아로 스쿠로 대비로 인해 검은 색 배경에서 나타나며, 미묘하고 거의 깜박이는 광도로 만들어져 전체 그림에 일종의 대기 불안정성을 준다.

소도마의 <성 세바스찬의 순교>다. 1525년.  전통적으로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사형을 선고받은 기독교 신앙의 남자인 로마군의 법무관 세바스찬은 전염병으로부터 보호자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세바스찬은 질병으로 인한 고통과 같은 가장 잔인한 고통 앞에서도 승리하는 강하고 젊은 아름다움의 이상을 구현한다. 

렘브란트 반 레인의 <늙은 남자의 초상( 늙은 랍비)>이다. 1665년.  이 초상화는 렘브란트의 다작 예술 경력이 끝날 무렵에 만들어졌으며 그 중 상당 부분은 초상화에 전념했다. 실제로 렘브란트가 1630년대 암스테르담에서 유대인 숙소에서 오랫동안 살았고 종종 이웃과 지인을 그림의 모델로 삼았던 것은 초상화 예술가로서 알려지게 되었다. 초상화에 있는 노인의 얼굴은 랍비의 얼굴로 확인되었다. 실제로, 초상화는 정확한 인물인 Rabi Haham Saul Levy Morteira라고 제안되었지만 문서는 아직 이것을 확인하지 못했다. 렘브란트는 초상화에서 노인의 심리를 연구하면서 자신의 표현의 분리된 수심과 그림의 어두운 배경에 휩싸인 듯한 생각에서 길을 잃은 인상을 강조한다. 이러한 음영은 화폭에 두껍게 퍼져 있는 질감의 색채를 사용하는 것이 특징인 작가의 기법에 의해 강조된다.

지오반니 안토니오 볼트라피오의 <참고인의 초상화(또는 제롤라모 카시오) >다. 1500년.  이 그림은 이마를 덮고 있는 어두운 모자와 어두운 옷을 입은 신사의 반쪽 흉상이며, 셔츠의 얇은 가장자리가 아래에 보인다. 재킷 옷깃에는 "CB"라고 쓰여 있는데, 그 의미는 알 수 없다. 그 남자의 사려 깊은 얼굴은 어두운 옷과 배경에서 나타나며 빛으로 윤곽을 드러냈고 실물 같은 특징과 생생한 심리적 렌더링으로 묘사된다. 볼트라피오의 친구이자 고객이었던 카시오로 더 잘 알려진 시인 지롤라모 판돌피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구체적인 속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 인물의 어두운 옷은 주목할 만한 사람이나 치안판사의 전형이기 때문에 그가 아마도 법적인 사람이었을 것임을 시사하기 때문에 약간의 주의가 필요하다.

브론치노의 <브론지노로 알려진 아놀로 디 코시모 토리 >다. 1542-1545년.  19세기 후반,이 그림은 이미 1539년 결혼하기 전에 태어난 "공작의 자연 딸"인 코지모의 초상화로 확인되었다 : 비아로 알려진 작은 비앙카. 1560년 시몬 포르투나는 편지에서 "공작은 처음 몇 년 동안 피렌체의 귀족 여성에 의해 비아라고 불리는 소녀를 낳았다"고 썼다. 그리고 공작부인은 아내가 되기 전에 남편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 소녀를 사랑스럽게 키우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 어린 소녀는 종종 일어났듯이, 톨레도의 엘리노어와 그녀의 할머니 마리아 살비아티의 애정에 둘러싸여, 집안의 합법적인 아이들과 함께 자랐고, 그녀는 많은 시간을 보냈고, 특히 그녀를 좋아했다. 불행하게도, 약 5세의 나이에, 비아는 갑자기 1542년 1월 말에 병에 걸려 몇 주 만에 사망했다. 순결함의 이름, 비앙카, 그리고 성인 공주에게 어울리는 보석이 풍부하다는 것을 암시하기 위해 흰색으로 된 어린 소녀의 옷에도 불구하고, 브론지노의 뛰어난 재능은 삶에서 행해진 그림의 모든 활기를 아이의 살아있는 이미지로 주었다. 이는 또한 아이가 거의 발을 딛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을 보는 앉은 자세와, 거의 활기가 차지 않은 채, 그리고 손가락 사이에 벨트를 끼고 안절부절못하는 모습 때문이다. 목에 달린 진주 줄뿐만 아니라, 아이는 현재 피티 궁전의 팔라틴 갤러리에 있는 폰토르모의 초상화에 나타나듯이 아버지 코시모의 프로필을 보여주는 메달이 달린 금사슬을 매고 있다

주스토 서스터만의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초상>이다. 1635년.  서스터만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이다. 파리와 제네바 사이에 살았던 루카 출신의 법학자 엘리아 디오다티가 의뢰한 것으로 갈릴레오의 훌륭한 친구로서 유럽 전역에 글을 유포하기로 약속했으며, 또한 그가 죽은 후 갈릴레오의 완전한 작품을 출판할 계획이다. 인물의 반쪽 흉상은 관객의 시선을 대상의 창백한 얼굴과 프레임 밖의 시선으로 끌어당기는데, 이는 동시에 영감을 받은 동시에 선견지명이 있었다.  당시, 갈릴레오는 약 70세 였고 아르세 트리 언덕의 피렌체에서 바로 떨어진 시골에서 추방 당했다.  1642년 갈릴레오가 죽은 후 그의 추종자인 빈센조 빌라니는 디오다티에게 초상화 소식을 요청하여 가지고 있다는 대답을 받았지만 페르디난트 2세에게 기꺼이 주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