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이다. 1885년. 이 그림은 빈센트가 스스로 첫번째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언급했던 작품이다. 그림은 시골 생활의 가혹한 현실을 묘사해야 했기 때문에 농민들의 거친 얼굴과 뼈만 앙상하고 일하는 손을 그렸다. 그는 이런 식으로 그들이 ‘접시에 넣고 있는 이 손으로 땅을 스스로 경작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는 다섯 명의 그림을 흑색으로 그렸다. “물론 먼지투성이 감자의 색깔 같은 것, 물론 벗겨지지 않은 것”. 그림의 메시지는 정확한 해부학이나 기술적 완벽보다 반 고흐에게 더 중요했다. 그는 그 결과에 매우 만족했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색깔이 너무 어둡고 실수로 가득 찬 수치 때문에 상당한 비판을 받았다. 요즘 이 그림은 반 고흐의 초기작 중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다.
고흐의 <아스니엘, 봐이에 다르장송 공원 : Square Saint-Pierre >이다. 1887년. 반 고흐는 이 화창한 공원 장면을 '연인들이 있는 정원의 그림'이라고 불렀다. 사랑에 빠진 커플들이 어린 밤나무 아래를 거닐며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앉아 있다. 그는 시냑의 영향을 받은 몇 작품을 그렸는데 그 중 하나다. ``반 고흐는 대신 길이가 다른 작은 붓놀림을 다른 방향으로 적용했다. 이것은 그가 표현하고 싶은 친밀감과 화합감에 맞는 빛나는 봄날의 효과를 만들어내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는 아내와 가족을 너무 갈망했지만, '가장 불가능한 연애'를 했다. 그는 결국 그 상황에 체념했다. 그는 그의 예술에 헌신했다.
고흐의 <화가로서의 자화상>이다. 1888년. 반 고흐는 이젤 뒤에 팔레트와 페인트 붓을 들고 이 자화상에서 화가로 자신을 선보였다. 그는 밝고 거의 혼합되지 않은 색상을 가진 새로운 그림 스타일을 사용하여 현대 예술가임을 보여 주었다.팔레트는 보완적인 색상 쌍인 빨간색과 녹색, 노란색과 보라색 및 파란색과 오렌지를 포함한다. 반 고흐가 이 그림에 사용한 색상이다. 그는 이 쌍들을 나란히 내려놓고 서로를 강화시켰다. 예를 들어 그의 스모크의 파란색과 수염의 주황색 붉은색 등. 화가로서의 자기 초상은 반 고흐가 파리에서 제작한 마지막 작품이었다. 도시는 그를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지치게 했다. 그는 여동생 윌에게 자신이 어떻게 묘사했는지 말했다. “이마와 입가에 주름이 있고, 뻣뻣하게 나무로 되어 있고, 아주 붉은 수염을 기르고, 꽤 늙고 슬프다.”.
고흐의 <랑글루아 다리 >다. 1888년. 반 고흐가 이 다리를 그렸을 때 하늘은 잿빛이었다. 그는 프랑스 남부 도시인 아를레스의 이 자리에서 한 번 이상 야외에서 일했다. 이 운하에서 세탁이 이루어졌고, 멀리 둑에 표백제를 깔기 위해 린넨을 깔았다. 없어진 것은 세탁소 여성뿐인데, 세탁소 여성은 이전 버전에 포함되었다. 반 고흐는 조심스럽게 그림을 정리했다. 그는 이젤을 위한 장소를 선택하여 왼쪽 배경으로 이어지는 큰 대각선으로 전경의 도로로 토지의 패치를 칠할 수 있었다.
고흐의 <해질녘에 씨뿌리는 사람>이다. 1888년. 반 고흐는 그의 예술적 경력을 통해 이 주제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모두 30개의 드로잉과 이 테마에 대한 그림을 그렸다. 그는 1888년 가을에 이 주제를 그렸다. 그림 속의 태양은 더 이상 뜨겁게 타오르지 않는데 이는 점차 줄어드는 화가의 에너지를 보여준다. 당시 반 고흐는 폴 고갱과 함께 일했다. 고갱은 그의 작품에서 현실과 상상력에 대해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반 고흐는 색깔이 감정과 열정을 표현하는 것을 의미했다.
고흐의 <해바라기>다. 1889년. 반 고흐의 1888년과 1889년에 프랑스의 남쪽에 있는 알레스에서 해바라기를 그렸다. 빈센트는 노란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마라’의 세 쉐이드와 함께 햇빛 꽃과 함께 5개의 큰 캔버스를 그렸다. 이 과정에서 그는 단일 색상의 숫자 변형을 가진 이미지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보여 주었고, 이는 단일 색상이다.
고흐의 <거리의 노란 집>이다. 1888년. 1888년 5월 반 고흐는 알레스(슈투던 프랑스)의 라마틴 광장에 있는 집에서 4개의 방을 세를 냈다. 녹색 셔터들은 그가 살아 있는 광장 쇼의 그림에 있다. "노란 집"으로 이사한 직후, 그는 테오에게 그의 그림의 설명과 스케치를 전달한다 : "노란 빛의 노란 집과 블루의 불완전한 신선함." 반 고흐가 "The Street"을 부르는 작품은 예술가의 즉각적인 서라운드 기록을 세웠다. 그는 왼쪽에 있는 레스토랑과 그의 친구인 포스트맨 조셉 룰린의 집에서 두 번째 철도 다리를 넘어서서야 했다. 빈센트는 노란 집에서 장소를 열렬히 만들었는데, 그는 단지 페인트를 칠할 수 없지만 친구가 나타나면 머무르게 될 것이다. 그의 계획은 예술가의 집에 노란 코너를 짓는 것이었다. 사랑받는 화가가 일할 수 있는 곳이다.
고흐의 <침실>이다. 1888년. 방은 작고 아무 장식도 없다. 개성을 드러내기 위해 고흐는 실제 하얀색인 가구를 노랗게 그렸다. 그러므로 초상화가 걸린 벽을 칠하는 것을 잊어버린 것은 아닐것이다. 의자는 원근법을 공부하기위해 그린 것이라기보다는 화가 자신처럼 벌거벗고 있지만 없어서는 안될 필수적인 물건인 의자와 자신을 동일시하려는 의도이다. 화가는 탁자 위에 일상생활에 필요한 여러 물건을 놓아 두었다. 그의 관점으로 보면 물건 각각은 영혼을 갖고 있다. 그는 방이 가족의 삶을 상징한다고 여겨 처음 구상할 때 침대 위에 누드 여인이나 요람 속의 아이를 그리려고 했단다.
고흐의 <수확하는 사람이 있는 밀밭>이다. 1889년. 반 고흐는 벽으로 둘러싸인 병실에서 이 들판을 그렸다. 그가 그곳에 있었던 첫 몇 달 동안, 그 곳을 떠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리퍼는 태양의 열기 속에서 일한다. 밀은 짙은 노란색의 덩어리로 칠해져 있었고, 그의 주위에는 물결이 일었다. 반 고흐에게 밀은 자연의 영원한 순환과 삶의 과도기의 상징이었다. 그는 리퍼를 '죽음의 이미지'로 보았다. 이런 의미에서 인류는 밀을 수확하는 것이 될 것이다.'그러나 그는 이 죽음이 '거의 웃고 있다'고 덧붙였다. 보라색 언덕 한 줄을 제외하고는 모두 노란색이다. 옅은 금발의 노란색이다.
고흐의 <아이리스>다. 1890년. 반 고흐는 생레미에 있는 정신과 병원에서 이 정물화를 그렸다. 그는 이 꽃이 사악한 영혼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할 수 있는 자연 형상의 형태와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해석했다. 꽃병은 배경과의 경계가 모호하여 불안해 이지만 강력한 보색들 사이의 조화를 이끌어내려고 했다. 선명한 레몬빛의 노란색의 배경이 감청색과 양홍색이 섞인 보라색 붓꽃을 두드러지게 한다. 꽃은 작고 긴 붓질로 정확하게 묘사되었고 고갱의 영향을 받아 짙은 윤곽선으로 인해 잎의 물질성이 더 강조되었다. 그림을 균형있게 만들기 위해 오른쪽에 부러진 가지를 그려 넣었다. 개인적으로 해바라기 못지 않게 좋아하는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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