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미술관/베를린 보데 미술관

베를린 보데 박물관 3

boriburuuu 2020. 12. 14. 22:43

바르톨로메오 카바셉피의 <플로라>다. 1770년.  모델을 기반으로 일하는 데 익숙했던 조각가는 로마 팔라조 디 스파냐에 있는 베르니니의 유명한 애니마 비타 흉상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애니마 비타의 머리카락에 있는 몇 안되는 꽃이 영혼의 유령의 표현을 증가시키는 데 도움이 되지만, 이면의 삶의 즐거움에 대한 꽃다발의 무성한 갈색 모델 화환은 강조된다 

 

 

 

 

사티루스와 님프다.

 

롬바르디의 우화다.

 

안토니오 카노바의 <댄서>다. 1809/1812년 제작.  약 실물 크기의 대리석 조각품은 안토니오 카노바가 비엔나 주재 러시아 대사인 안드레이 라즈모스키 백작을 대신하여 창안되었다. 춤추는 사람은 겉으로보기에는 무중력한 움직임으로 다리를 빙빙 돌리고, 손이 든 덩어리를 우아하게 잡고 있다. 섬세하고 고대적인 가운은 그것을 가리키는 것보다 잘 형성된 몸을 보여준다. 은혜로 가득 찬 댄서의 균일하게 형성되고 신중하게 얼어 붙은 머리는 옆으로 기울어져 있다. Carrara 대리석으로 만든 인물에는 동상이 회전할 수 있는 꽃걸이로 장식된 둥근 대리석 포스트가 포함된다. 따라서 원래 소유자는 각 입사 빛을 고려하여 그림의 아름다움과 완벽함을 인식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카를로 마라티의 초상이다.

피에르 푸제의 <성모의 승천>이다.

지오반니 바라타의 <로마 교회의 알레고리>다.

천사다.

지오반니 로렌조 베르니니의 <돌고래를 타고 있는 푸토>다. 1618년.  돌고래의 푸토의 인물 그룹은 다른 예술가가 아닌 로마 바로크 양식의 대가인 베르니니의 초기 작품 중 하나다.  베르니니는  아버지 피에트로 베르니니의 워크샵에서 교육을 받았을 때 만들었을 것이다.  아마도 갈레리아 보르게세(로마)에서 같은 주제의 고대 대리석 그룹에 의해 영감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특이한 방식으로 다양했다. 고대부터 특히 아이 친화적인 해양 동물로 여겨지는 돌고래는 아이를 오른쪽 종아리를 물어뜯는다. 고통이 심해 아이는 목을 젖혔다. 분명히, 동물은 돌고래와 가난한 소년과의 우정을 보고하는 고대 문학에서와 달리 바다에 들어가려는 소년의 열망에 반대한다. 

프랑수아 두케스노이의 <아치 조각 아모르>다. 1629년 이전 . 

베르나르디노 카메티의 <사냥하는 다이아나>이다. 1720-1750년.  완공된 지 30년이 지난 후에야 다이애나 동상은 오크의 족한 가지가 자라는 바위가 많은 암석으로 자연주의 받침대를 받았다. 그림은 받침대에 장착되어 여신이 넓은 단계로 시청자에게 대항하여 앞쪽 왼쪽 어깨를 향하게 되었다. 오른쪽에서 볼 수 있는 변화된 견해에서 동상은 분명히 훨씬 더 조화로운 인상을 준다. 몸과 펄럭이는 가운의 윤곽은 옆으로 향하는 머리와 마찬가지로 닫힌 윤곽 아래에 배치된다. 이 구성 방식에서, 동상의 머리 유형과 의복 디자인과 마찬가지로, 캐릭터는 궁극적으로 라파엘에 기인한 고전적인 경향에 전념한다. 

바치오 다 몬테루포의 <세례 요한>이다.  1500년경 .

플로렌즈 앙팡의 <골리앗의 머리와 다윗>이다.

 

플로렌즈 앙팡의 <도비지아>다.

 

<아이와 함께 서 있는 마리아>다.  1330년.   큰 백합모양의 웅장한 왕관에는 이전에는 모조보석 있었다.마리아의 몸 위에는 눈에 띄게 많은 물질이 있으며, 그 조각은 항상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드레스와 코트는 모두 외부에 금박을 입히고 붙인 모조보석  (색이 있는 예금 유리)으로 정교하게 붙였기 때문이다. 엉덩이에서 내려온 그리스도는 어머니에게 돌아가려한다. 성모님의 얼굴을 특별한 관심을 받을 만하다. 일반적으로 고딕 양식의 마리아 인물의 중심 지역으로서, 이상적으로 그림의 표현이 절정에 달하는 베를린 마돈나의 얼굴은 특별한 계급을 부여받는다. 웅장한 금박을 입은 옷과 법원의 시원한 얼굴 표정은 13세기 이래로 왕관을 쓴 천국 여왕의 위엄 있고 높은 성격을 강조한다. 

<성도의 유물 흉상>이다. 1300년경. 가느 다란 목과 길쭉한 얼굴을 가진 여성 성도의 흉상을 보여준다. 그녀의 대략 남겨진 두개골 kalotte가 보여 주듯이, 그녀는 이전에 별도로 작업된 왕관을 착용했다. 13세기 후반에 살아남은 서양의 머리와 흉상 유물의 수가 크게 증가하고 있다. 종종 이 유물은 이제 금세공예품의 작품이 아니라 점점 더 소중하고 다소 눈에 띄는 버전의 목재 그림 작품이었다. 특히 쾰른의 우르술라 숭배와 관련하여 약 1260년 이래로 만들어진 흉상의 비율은 더 넓은 범위의 반경을 가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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