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박물관

이스라엘박물관 폴 고갱, 반 고흐, 폴 세잔

boriburuuu 2020. 12. 19. 00:15

폴 고갱의 <우파 우파(불춤)>이다. 1891년  고갱은 타히티로 가서 6월에 수도 파페테에 도착했지만 그가 갈망했던 원시적인 생활방식, 부족미술, 이교도 종교를 찾을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도는 지방 식민지 였고 선교사들은 타히 티아 예술을 파괴했으며 원주민들은 기독교인이었다. 고갱은 패배를 인정하는 대신 그가 찾던 잃어버린 세계를 재창조했다. 그는 프랑스 책에서 타히티아 종교를 탐구하고 프랑스 컬렉션에서 마르케산 미술을 공부했으며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마타이에아에서 토착 생활 방식을 채택했다. 우파 우파는 고갱의 첫 번째 시도로, 문자 그대로 "이렇게 멀고 신비로운 과거의 흔적을 되찾고, 고대 난로를 재발견하고, 이 모든 재 속에서 불을 되살리기 위한 것"이다. 파페에테로 그려지거나 마타이에아로 이사한 직후, 그것은 왼쪽의 댄서들이 보여주듯이 무릎이 구부러지는 동안 허벅지를 열고 닫는 등 에로틱한 움직임 때문에 프랑스인들이 금지했던 토착 춤을 기록하고 있다

폴 고갱의 <스트롤에 있는 여자(작은 파이지엔느)>다. 1880년   주로 화가로 알려져 있지만 고갱은 현대 조각에 강한 영향을 준 능숙한 조각가였다. 그가 직접 만든 이 조각상의 버전은 새로운 조각 스타일에 대한 그의 검색을 문서화했다. 하나는 드가가 선호하는 매체인 왁스로 모델링되었고, 다른 하나는 나무로 모델링되었는데, 고갱은 그 자신의 것을 만들었다. 이스라엘 박물관의 석고 및 청동 버전은 고갱이 사라진 왁스 원본에서 사망한 후에 만들어졌다

폴 고갱의 <바우기라드의 집들>이다. 1880  고갱의 풍경은 밀도가 높고 건설된 요소를 가지고 있다. 중간지대의 집들은 그림의 전체 폭까지 뻗어 있어 시청자의 눈을 막고 있어 그림 표면에 눈을 가까이 두고 있다. 오른쪽에 있는 창문이 없는 건물은 이러한 차단 효과를 더욱 강조한다. 어느 정도 깊이가 존재하지만 옥상과 바삭바삭한 그림자 벽의 날카로운 각도를 따라 지그재그 경로를 따른다. 이 두 차원과 세 차원 사이의 연극과 기하학화된 건물의 적층은 세잔도 폰토이즈에서 동시에 일했음을 상기시킨다. 사실 고갱은 1880년에 개인 소장품으로 세잔을 구입했다. 고갱의 음색, 밀접하게 관련된 녹색, 갈색, 오렌지는 그림의 콤팩트함을 더한다. 유일한 공기감각은 창백한 하늘 조각에 의해 제공된다

폴 고갱의 <정물>이다. 1899년.  고갱은 아마도 캔버스가 다 떨어진 8월에 이 정물화를 거친 트림에 그렸을 것이다. 찻주전자와 투수는 접시에 담긴 다양한 과일과 가슴 위에 드리워진 식탁보 위에 있는 과일을 시각적으로 분리한다. 파레오에 있는 식물들은 그들 뒤에 매달려 있었고 식탁보에 있는 꽃들은 그들의 배경에 섞여 있고, 과일과 가슴의 따뜻한 색깔은 나머지 그림의 시원한 색깔과 대조를 이룬다. 주요 영향은 1877-1879년의 Compotier가 있는 세잔의 정물에서 나온 것으로, 비슷한 배경 앞 테이블에 비교 가능한 물체와 과일이 놓여 있다.

폴 고갱의 <마르티니크의 마을>이다.1887년   1887년 고갱과 찰스 라발은 파나마로 갔다가 마르티니크로 가서 따뜻하고 건강한 기후와 자연스럽고 "구원한" 삶을 살 수 있는 값싼 장소를 찾았다. 여름 동안 이곳에 묘사된 것과 같은 오두막집에 머물면서, 그림을 그렸다. 이 특정 나무 아래에서 젖을 들이키는 염소, 발을 들고 있는 앉은 여성, 걷는 여성과 같은 이미지를 묘사한다. 그는 1889년 아연 그래프에서 마르티니크의 추억에 통합되었다.여전히 기본적으로 인상주의적인 스타일이지만,이 그림은 주제와 색에 대한 그의 접근 방식의 변화를 나타낸다.

폴 고갱의 <개가 있는 풍경>이다. 1903년.  이 그림은 그가 죽은 해인 1903년 초 마르케사스의 히바 오아에서 만들어진 6개의 작품 중 하나다. 그의 집에서 산을 향한 내륙의 경치를 묘사했다. 도로와 그의 재산을 분리하는 암벽 뒤에는 벤 바니의 가게가 독특한 청록색으로, 그리고 그 너머에 카톨릭 선교단의 화합물이 서 있다. 그의 재산에는 덩굴 아래 열대성 판다누스 잎 더미와 야생 바나나 가지가 포함되어 있었다. 풍경의 구성은 고전적이다. 퇴각하는 평면은 표면에 평행하게 놓여 있고 대각선은 깊이의 느낌을 제공한다. 따라서 보라색과 분홍색 영역 사이의 대각선 경계는 잎 더미와 나무 더미의 오른쪽, 지붕 및 왼쪽 자줏빛 언덕에서 메아리 친다

빈센트 반 고흐의 <프로방스의 추수>다. 1888년  1888년 6월 20일 그 자리에서 그려진 프로방스의 수확은 반 고흐가 35년의 주어진 여름 날에 그것을 경험하면서 시골 생활의 단편을 묘사한다. 그림은 유동적인 상태를 불러 일으킨다. 하늘의 붓놀림은 신경질적인 여름 바람에 의해 날아다닌다. 수평선의 선은 태양열 아래에서 물결을 일으킨다. 멀리 있는 풀 바디 농장 건물은 자연의 생산물로 가득 차기를 갈망한다. 그리고 전경에는 옥수수 춤 다발이 그들의 땅거처에 마지막 작별 인사로 산들바람에 춤을 추고 있다

빈센트 반 고흐의 <아스니에르의 보이어-드'아르겐슨 공원 입구>다. 1887년

폴 세잔의 <강가의 시골집>이다. 1890년  세잔의 풍경에서 흔히 그렇듯이, 우리의 작품에서 장벽은 물로 우리를 장면과 분리시켜 멀리서 보는 사색의 대상이 된다. 중앙에 위치한 집은 키가 큰 나무들로 장식된 단순화된 기하학적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지 않고, 물의 표면을 뒤흔드는 잔물결도 없다. 모든 것이 안정적이고 조용하다. 깊이와 부피는 형태들의 중첩과 색의 조작에 의해 달성된다. 따뜻한 황갈색과 시원한 녹색 톤의 나란히 배치된 음영은 사각형과 직사각형 방향 브러시 스트로크의 구조화된 평면에 적용된다. 이러한 모델들은 구성의 전반적인 건축 순서에 기여하고 있다. 하늘의 옅은 푸른색은 물러가지만, 공간감에도 불구하고 캔버스의 2차원성 또한 스스로 주장하고 있다

폴 세잔의 <태양에 대항하는 엘스타크의 아침 풍경>이다. 1882-83 년. 반투명 파스텔 음영의 얇게 칠해진 표면은 이 캔버스에 유체, 수채화 같은 품질을 준다. 노출된 지면의 중요한 지역은 그것의 전반적인 금발 톤을 더욱 향상시킨다. 이런 식으로 세잔은 프랑스 남부의 열과 강한 빛을 능숙하게 전달하는데, 이 빛은 물체에서 색이 빠져 나오는 경향이 있어 씻겨진 외관을 만들어낸다

폴 세잔의 <벤드 옆의 나무>다.  1881-82 년.  세잔느의 성숙한 스타일은 이 그림에서 아직 완전히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그는 그 기초 구조에 대한 일반화된 개념에 찬성하여 경관의 순간적인 측면을 포착하는 것에서 분명히 벗어났다. 20년간의 연구와 생각 끝에 그는 자신의 개인적 비전에 도달하는 데에 성공했다 

폴 세잔의 <에스타트의 바위들>이다. 1865년  이 작품에서 페인트의 작은 규모와 자발적인 적용은 그것이 야외에서 행해졌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 무렵 세잔은 야외에서 일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한 생각을 결정하기 시작했다. 그는 소년 시절 친구인 작가 겸 비평가 에밀 졸라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러나 스튜디오에 그려진 모든 그림은 밖에서 하는 일만큼 좋지 않을 것이다."라고 썼다.

폴 세잔의 <리버 벤드(코인 드 리비에르)>다. 186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