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미술관/슈테델 미술관(프랑크푸르트)

슈데텔 뮤지엄 4

boriburuuu 2020. 12. 23. 11:45

오토 스콜더러의 <창문가의 바이올리니스트>이다.

페르디난드 호들러의 <헬렌 바이글레의 초상>이다. 1888년.  스위스 상징주의자는 16세의 헬렌 바이글레의 초상화에서 투명한 구조로 여성원리를 길들인다. 사진의 상부에 어두운 길로 열리는 거대한 나뭇잎은 젊은 여성의 엄격한 프로필과 회색 배경에 대한 그녀의 체크 드레스와 나란히 놓여 있다. 그녀는 오히려 하나의 국화를 면밀히 보고 있으며, 그녀의 우아함은 마치 관찰되는 것을 알고있는 것처럼 인위적인 것처럼 보인다.

오딜롱 레동의 <그리스도와 사마리아 여인(흰 꽃 부케)>이다.  1895년.  눈으로 볼 수 있는 한 시야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레돈은 성경 이야기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사마리아인 여성을 색으로 가득찬 공간으로 만나서 장소를 변화시켰다. 두 인물 모두 반짝이는 하얀 꽃다발을 향해 돌아섰다: 예수가 여성에게 영적인 깨달음의 표시라고 묘사하는 영생의 물인가? 시청자는 꿈같은 사건을 이해하기 보다는 감지한다. 1890년대 초까지 지속되는 "블랙" 단계와 레돈이 그래픽 작품에만 헌신한 후, 상징예술가의 내면화되고 종종 신비로운 회화 세계는 강렬하고 무중력한 컬러풀함을 보여준다.

지오반니 세간티니의 <일몰 풍경>이다.

피에르 푸시드 드 샤반의 <사막의 성 막달라 마리아>다. 1870년.  악순환 의 신 또는 회개의 아이콘.  막달라 마리아의 묘사는 두 해석 모두의 여지를 남긴다. 푸비스 드 샤반느는 거의 추상적이고 우화적인 인물로 희소한 풍경 앞에서 회개하는 것을 묘사했다. 그녀의 관능성은 그녀의 긴 머리에 의해 그녀의 맨 가슴에 국한된다 - 두개골과 그녀의 고정 된 시선에 의해 파열 되는 모티프. 인상주의 시대에 작가는 고전적 웅장함의 명확한 구성을 달성했다.

마우리스 드니스의 <목욕하는 사람들>이다.  1907년.  포스트 인상파 화가 모리스 데니스는 섬세하게 착색된 수영복 장면을 캔버스화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간 딱딱하고 인공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작가의 인상을 시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매듭이 달린 머리카락과 하얀 수건으로 여성들은 여신처럼 보인다. 빛과 그늘의 상호 작용은 밝은 파스텔 색조로 재현되어 우아한 인물이 경외심으로 잃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그림의 중심에있는 어린 소녀는 목욕 장면을 자연스러운 결백을 알려준다.

프란즈 본 스터크의 <아담과 이브>다. 1920년.  사람의 타락은 파라다이스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화가의  정신 상태에서 성장했다. 부드럽게 아치형 콘트라포스토에서 아담과 이브의 나체는 그림의 전경의 무대로 나타난다. 뱀은 이브의 다리 주위에 몸짓을 하고, 사타구니를 소유하고, 뻗은 팔을 뻗어 마침내 날씬한 손가락에 들고 있는 사과를 물고 있다. 빨간 머리의 여인은 그림자에서 아담을 갈망하며 바라본다. 그의 제스처는 그녀의 몸을 가리킨다. 죄, 정욕, 퇴폐 - 뮌헨의 "화가 왕자"가 자신을 상징적으로 여기 시각화하는 현재 상태다.

프란즈 본 스터크의 <피에타>다. 1891년.  아들을 잃은 메리는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빛난다. 화가는 전통적인 피에타에 훌륭한 드라마를 주입했다. 그의 고립된 인물들은 서로 수직이며 삶과 죽음의 대조를 인격화한다. 그리스도의 벌거벗은 시체는 그녀의 고뇌속에서 존재하며,  마리아보다 훨씬 더 입체적이고 더 현실적으로 보인다. 그리스도의 주제는 순전히 비참함과 슬픔과 같은 실존적 감각을 강조하는 구실로 봉사한다.

오귀스트 로댕의 <이브>다. 1881년.  이브는 부끄러운 머리를 팔에 숨긴다. 그녀와 아담의 모습은 단테의 '신성한 코미디'에서 영감을 받았지만 로댕이 완성하지 못한 프로젝트인 '지옥의 문'을 곁에 두는 것이었다. 이브 자신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로댕의 모델이 임신했다는 사실은 그의 심리적 강렬함에서 반영된다. 여기서 그녀는 매혹적인 사람도 무죄도 아니라 원래죄 를 세상에 가져오는 '원시어머니'다. 1899년 그녀는 기지 없이 전시된 최초의 현대 조각품으로 대중에게 눈을 사로잡았다.

맥스 베크만의 <프랑크푸르트 암마인의 회당>이다. 1919년.  건물이 숨어  흔들리는 불안정한 마을 풍경은 소수의 사람들을 삼키는 것 같다. 검은 옷을 입은 화가 자신과 그의 친구 우기와 프리델 바텐베르크가 카니발을 축하하는 밤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있다. 그들은 프랑크푸르트의 뵈르네광장 광장에 양파 모양의 돔이 있는 회당을 지나고 있다. 아침기도가 내부에서 진행중이다. 이 장면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베크만이 실존적 위기 중 하나였던 위협적인 상황을 상징한다.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의 회당은 그가 1915년과 1933년 사이에 프랑크푸르트에서 그린 일련의 도시 경관 중 첫 번째였다.

알렉세이 본 잘렌스키의 <추상적인 머리:핑크의 심포니>이다. 블라우어 라이트어 그룹의 일원인 작가는 이런 종류의 작품을 인간의 얼굴의 보편적으로 유효한 고풍스러운 이미지를 찾아냈다. 잘렌스키는 1918년 '추상적 머리' 시리즈를 시작했다. 추상화와 비유를 번갈아 가며 251점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경건한 러시아인은 자신을 러시아와 비잔틴 예술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의 작품에서 의도적으로 아이콘 그림을 언급했다.

막스 베크만의 <색소폰이 있는 정물>이다. 1926년.  모든 논리적 공간 질서를 무시, 다양한 개체 – 그들 대부분은 쌍으로 그룹화 – 군중과 서로 연동. 두 개의 큰 색소폰은 시끄러운 음악의 연결한다. 인형이 뿔에 의해 찌그러지고 피치 흑색으로 보이는 것에 대해 소름 끼치는 무언가가 있다. 이 그림은 아티스트가 좋아하는 음악 스타일인 재즈를 보여준다. 왼쪽의 색소폰은 프랑크푸르트 재즈 클럽인 '바 아프리카'의 이름을 지니고 있으며, 다른 한 쪽의 '뉴욕에'라는 단어는 이러한 리듬의 뿌리를 암시한다.

펠릭스 발로통의 <로마넬 근처의 주라산의 풍경>이다.

칼 본 피돌의 <베니스의 카도르 앞 안나 코스만의 초상>이다. 1894년.  따뜻한 금색으로 빛나는 베네치아 궁전의 풍성한 장식 외관은 인물을 시원하고 외롭게 보이게 한다. 초상화는 바이마르 첼리스트 베른하르트 코스만의 32세 딸 안나 코스만의 초상화다. 르네상스의 스타일로 옆 얼굴을 그렸다. 화가는 이탈리아 미술의 영향을 크게 받은 로마의 독일인 중 한명인 한스 폰 마리아스의 제자였다. 여인의 날카로운 윤곽과 평면및 섬세한 외관의 대조와 겹치는 것은 묘사된 사람이 발산하는 자부심과 자신감을 강조한다.

오귀스트 로댕의 <늙은 오크 나무>이다.

유게른 카리에르의 <수면>이다.  1890년.  이 그림은 한 여성과 유아가 나란히 자고 있는 그림이다. 그러나 클로즈업 뷰에도 불구하고, 표현의 흐릿하고 포괄적인 모드는 관람자를 회피한다. 두 인물의 윤곽은 거의 만들어낼 수 없으며 어둠 속에서 떠있는 것처럼 보인다. 프랑스 상징주의자의 트레이드 마크인 회색과 갈색의 부드러운 초점과 거의 단색적인 팔레트는 어머니와 아이의 친밀감을 외부 세계에서 가리는 동시에 전달한다. 어머니와 아이의 이미지는 카리에르의 오브제의 상당 부분을 형성한다.

귀스타프 모로우의 <피에타>다.  1867년. 두 연인처럼, 성마리와 그리스도는 부드러운 친밀감으로 서로 마주한다. 십자가 기슭에서 어머니는 반쯤 자란 몸이 여전히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는 아들을 향해 몸을 구부린다. 그들의 젊은 얼굴, 감동 할로에 의해 하나의 단위로 병합, 슬픔과 고통으로 가득하다. 모로는 전통적인 모티프에서 추출한 새로운 꿈같은 메아리다. 영적 회화의 작은 형식으로 행해진 이 작품은 깊은 종교적 성실에 스며든다. 그 다른 세상, 영적 분위기는 모로를 상징주의자들의 선구자로 드러낸다.

엘베르트 본 켈러의 <순교자>다.

리차드 오엘세의 <고풍스러운 조각>이다.

막스 언스트의 <아퀴스 잠수함>이다. 1919년. 세상은 생명이 없는 배경으로 모여있다. 수영장 앞에  팔다리가 없는 모습이 서 있다. 또 다른 다이빙은 물 속으로 곧장 뛰어들었다. 밤하늘은 무대 세트처럼 장면 위에 나타나며, 소품같은 건물에 의해 드리워진 단단한 그림자와 달이 있어야 하는 시계의 존재로 인해 강화된 인상이다. 이 행위는 초현실주의 맥스 에른스트가 합리적 세계를 거부하는 것으로 보았던 것을 비유한다. 그의 예술에서 그는 물로 상징되는 정신의 무의식적인 부분에 대해 강렬하게 염려했다.

막스 언스트의 <새벽의 자연>이다. 1936년.  에로틱하게 충전된 추격 장면: 왼쪽에서 오는, 인류화 조류 생물은 정글 같은 덤불을 통해 그것의 방법을 팔꿈치. 그 목표는 사진의 오른쪽 하단 모서리에 웅크리고 벌거 벗은 여성 그림이다. 그림은 예술 자체의 주제를 해결 - 창조적인 과정의 에로틱한 영감과 다른 구체에 자아의 몰입. 막스 에른스트의 작품에서 숲은 자연과 어두운 면을 위해 세계뿐만 아니라 세계를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그것의 미적 변환 및 레크리에이션을 의미 하며 새의 유령 그림은 작가의 자아를 나타낸다.

볼커 보링거의 <시골의 목가적인>이다.

앙리 루소의 <세인트 클로드 공원의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