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미술관/슈테델 미술관(프랑크푸르트)

슈데텔 미술관 5

boriburuuu 2020. 12. 23. 21:40

파울 클레의 <어린 양>이다. 1920년. 어린 양은 잃어버린 아이처럼 다채로운 줄무늬 우주를 걷고 있다. 머리 위의 십자가는 전통적으로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죽음을 상징하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화가가 특별한 종교적 입장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클레의 작품에 대한 종교적 내용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반면, 작가와 하나님을 비교하는 것은 그의 글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신성한 존재로부터 세상을 창조하는 것은 불가분의 희생과 관련이 있다. 양은 이것에 암시 일 수있다.

프란즈 마르크의 <눈속의 개>다. 1911년. 마르크의 '루시'는 눈 침대에 평화롭게 자리잡고 있다. 작가는 "노란 색과 차가운 눈의 차가운 흰색, 그리고 그 안에 있는 파란색 사이의 순수한 색 관계"가 성취되기 전에 오랫동안 코트를 입어야 했다. 칸딘스키와 마르케와 블라우어 라이터 예술가들의 관계를 창립한 마르크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동물들의 순수하고 깨끗한 삶의 개념을 구현했다

오귀스트 르노와르의 <작은 목욕하는 여인>이다.

오토 뮐러의 <아담과 이브>다. 1913-1922년.  오토 뮬러는 '브뤼케' 화가들 사이에서 로맨틱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평생 동안 그는 단순하고 원시적인 것을 찾기 위해 누드, 집시 그림 및 초상화의 작은 레퍼토리에 자신을 국한했다. 이상주의가 아니라 예술 시장에 큰 감성을 보였다. '아담과 이브'는 연인들의 많은 그림 중 하나다. 그러나, 남자와 자연의 묘사는 거의 원시적이지 않다

빌헬름 렘부르크의 <앉아있는 청년>이다. 렘부르크는 독일의 대표적인 표햔주의 작가로 20세기 초 다양힌 유파의 소용돌이 속에서 극당적 추상을 거부하고 인간의 내적 진실 추구에 전념해 독특한 조형이념을 부각시킨 작가다. 이 작품은 1차 대전 직전 미술관이 직접 구입한 것으로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이 작품을 보면 극도의 변화와 혼란의 시기를 산 내적 절망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였나? 1919년 그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마르크 샤갈의 <랍비>다.

마르크 샤갈의 <거룩한 택시>다.

에드바르드 뭉크의 <질투>다. 1913년. 두 남자 사이의 한 여성: 왼쪽에 있는 폴란드 작가 스타니슬라프 프르지비체프스키는 광란과 녹색, 반면, 맨치의 특징을 가지고 오른쪽의 그림 - 철회 보인다. 그림이 그려졌을 때, 마침내 프르지비체프스와 결혼한 편지의 여인 대니 줄리의 질투 장면은 이미 먼 과거에 속해 있었다. 뭉크의 후기 작품에서 팜므 파탈의 등장은 그의 연인 툴라 라슨과의 긴장가득한 관계와 관련이 있다. 그들의 다툼은 여전히 별거 후 수년 동안 화가를 괴롭혔다.

앙리 마티스의 <꽃과 중국(카푸친 크레스)>이다. 1913년. 나스투르티움은 실제로 "파란색으로"성장하고 있다. 위의 세라믹 플레이트는 녹색 달로 보인다. 그림은 더 이상 3차원 공간이 아니라 색상만 있는 것으로 성장하고 있다. 오브젝트의 실제 세계에서 제거된 빛나는 파란색은 독립적인 가치를 얻는다. 이 그림은 그림의 표면이 순전히 장식 요소로 구성된 작가의 중요한 초기 정물 중 하나다. 마티스 그는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가 중 한 명이었다.

오귀스트 마르케의 <힐터필켄 전망>이다.  1914년. 1913년 10월, 맥케는 스위스 툰 호수에 있는 작은 마을 힐터핀겐으로 갔다. 여기서 그는 주변 시골을 강하게 추상화한 구성으로 묘사했다. 작가는 다양한 녹색 색조의 초원을 표현하기보다는 노란색과 보라색, 주황색, 파란색과 같은 보완적인 색상을 리듬감 있는 교대로 나란히 배치했다. 그는 구불구불한 들판과 마을 주택의 박공 지붕을 모자이크처럼 표면을 가로지르는 삼각형, 마름모, 직사각형으로 번역했다. 자연과 건축에 대해 똑같은 형식적인 언어를 선택함으로써, 그는 그들을 하나로 모아 전체를 형성했다.

오귀스트 마르케의 <누드 소녀와 머리 스카프>다. 1910년.

오귀스트 마르케의 <리틀 월터의 장난감>이다. 1912년.   화분에 심은 식물 외에도, 작가는 부드러운 장난감, 공, 러시아 마리오시카 인형이라는 두 살난 아들 월터의 장난감을 그렸다. 이 작품은 왼쪽 위부터 빛나는 밝은 빛, 눈에 띄는 상단 보기 및 색상의 본질적인 가치의 대담한 사용을 통해 놀랍고 어린이 친화적인 선명도를 얻는다. 빨간색과 녹색 의 대비는 검은 윤곽과 부드러운 장난감의 몸에 흰색 패치에 의해 표현성이 더욱 높아지는 구성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오귀스트 마르케의 <두 여자>다. 1913년.  큰 도시의 분주한 저녁 번잡한에서 두 여자. 모든 것이 움직이고 있다.  그림은 두 번, 장면을 통해 잘라 색상 라인, 건물 사이의 빛의 눈부심의 원추를 나타낸다. 마르케는 이탈리아 미래학자들이 그림에서 속도와 기술을 영화롭게 하는 방식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구성을 추상적인 형태로 완전히 줄이지 않았다. 소녀들은 진행을 숙고하지만 주변 환경과 병합하지 않았다.

안스트 루드윅 키르히너의 <하얀 슈미즈를 입고 누워 있는 여인>이다. 1909년.  소파에 기대어 있는 이 매혹적인 여성은 키르히너의 드레스덴 연인인 도리스 그로스다. 에로틱한 제스처가 무의미한 것처럼, 그녀의 손은 그녀의 푸딘다에 에로틱하게 달려있다. 신선하고 다채로운 팔레트와 느슨한 브러시 워크는 이 초기 묘사의 감각을 향상시킨다. 장면의 그림은 자발적으로 보이지만 신중하게 언더 드로잉으로 준비되었다. 키르히너는 전문 모델에 의존하지 않았고, 대신 거실과 공부를 하는 그의 스튜디오에서 친구와 연인을 그리기로 선택했다.

안스트 루드윅 키르히너의 <영국 댄서들>이다. 1909년.  음악홀의 데미몬드의 장면에서 키르히너는 무용수들에게 솔로, 커플, 그룹 등 몇 번이고 공연을 보여준다. 에로티시즘과 운동은 이러한 표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여기서 댄서는 여자의 속옷을 공개하기 위해  너무 빨리 파트너를 회전시키고 있다. 그는 그녀의 관능적인 분열을 응시 할 수있는 유일한 사람이 아니다. 키르히너는 드레스덴에서 이 작품을 그렸다.

안스트 루드윅 키르히너의 <모자를 쓰고 서 있는 누드 1911>다.  키르히너는 이 그림을 "드레스덴에서 내 최고의 누드"라고 불렀다. 그의 연인 도리스 그로스의 매우 수직적이고 거의 실물 크기의 초상화로 동시에 자연스럽고 매혹적으로관람자에게 가볍고 깨끗한 몸을 제공한다. 에로틱하게 꾸며진 스튜디오는 방이 아닌 배경이며, 무대역할을 한다. 편안한 자세와 그녀의 피부의  흰색은 그녀의 입술과 신발의 공격적인 빨간색, 그녀의 도전적인 시선과 그녀의 pudenda의 프리젠 테이션과 대조를 형성한다. 근대 미술과 현대 미술의 다리가 된다고 해서 다리파로 불리는 독일 표현주의의 대표 화가였던 키르히너는  루카스 크라나흐에게서 영감을 받았다. 크라나흐의 비너스와 자세와 목걸이, 목의 위치, 발의 방향과 체형이 유사하다.

안스트 루드윅 키르히너의 <씽크대의 두 여자, 자매들>이다. 1913년. 이 유행과 정교하게 메이크업한 여성은 대도시 감각을 발산하고 있는데 키르히너는 1912년 베를린에서 에르나와 게르다 쉴링 자매를 만났다. 여성의 애정과 세련된 옷은 키르히너의 거리 장면의 코코테에서도 볼 수 있다. 자매들도 마찬가지로 때때로 자신을 매춘했을 가능성이 높고 손을 씻는 과장된 표시는 성행위 후 클렌징으로 읽을 수 있다. 이 영향을 받는 제스처는 "그들은 문제의 손을 씻고 있다"처럼 보인다.

안스트 루드윅 키르히너의 <엄마와 딸>이다.  1924년.  엄마는 한 손으로 딸을 단단히 붙잡지만 다른 손으로 밀어 넣는다. 부모의 경험은 그녀의 슬픈 시선을 통해 말하고, 아이는 크고 순수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몸의 단순화된 형태와 인물의 거친 표면과는 달리, 키르히너는 소녀의 성에 대한 기괴한 세부 사항의 정밀도로 여기에 자신을 바친다 : 그녀의 질은 빨간색으로 칠해져 있다. 유럽 이외 지역의 예술에서 영감을 얻은 이 나무 조각은 1920년대 중반에 제작된 커플의 일련의 표현 중 하나다.

칼 로트루프의 <키오스크에서>이다.

 

안스트 루드윅 키르히너의 <꽃을 가진 뮐러의 두상>이다.

안스트 루드윅 키르히너의 <달빛 아래의 아코디언 연주자>이다. 1924년. 

 

오토 딕스의 <화가의 가족>이다. 1927년. 리틀 우르수스는 아버지의 다소 끔찍한 미소에 회의적으로 반응한다. 딕스는 네 살 난 넬리를 추가하여 강화된 고전적인 삼각형 구성으로 어린 가족을 묘사했다. 우르수스는 모든 주의를 기울이고, 마르타 딕스는 다정한 마돈나 같은 표정으로 아기를 내려다보기도 한다. 작가는 올드 마스터리 글레이징 기법을 사용하여 빨간색과 주황색의 빛나는 색조로 나무에서 장면을 연출했다. 그것은 성가족의 초기 묘사를 연상시킨다

칼 호퍼의 <두 친구들>이다. 1926년.  맨몸을 가진 두 사람은 서로 가까이 서 있다. 오직 노인만이 신체접촉을 모색하고 있다.  젊은 남자는 거리를 두고 터치에 응답하지 않는다. 친밀감과 거리의 불균형은 호퍼가 심한 모양, 피부의 녹색 투명도 및 인물의 정적 정면으로 강조하는 특정 불안함을 부여한다. 구약전서에서 가져온 '다윗과 조나단'의 초기 제목은 동성애적인 남성 우정의 개념을 반영한다.

칼 호퍼의 <눈먼 남자와 소녀>다.  1943년.  1943년 칼 호퍼의 베를린 스튜디오는 폭격으로 파괴되었다. 1937년 국가 사회주의자들이 자신의 직업에서 금지한 화가는 1,000개 이상의 그림이 불길에 휩싸이면서 바라봐야 했다. 이 핵심 작업은 얼마 지나지 않아 만들어졌다. 호퍼는 파괴된 도시의 폐허 앞에서 맹인으로 자신을 소개한다. 작가는 이렇게 자신의 상실과 무력함을 강조하지만, 동시에 희망의 희미한 빛을 제공한다 : 그는 낙관적으로 앞으로 응시하는 젊은 여성의 모습에 지원을 찾는다. 호퍼는 같은 해 이 모티브의 두 가지 버전을 더 그렸다.

페르난도 레거의 <어부>다.

한스 루드비히 카츠의 <고리버들 의자에 앉은 젊은 여인>이다. 1933-34년.  유태인 아버지와 개신교 어머니의 아들인 한스 루드비히 카츠는 카를스루에에서 태어났으며, 그곳에서 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1918년부터 전시회에 참가하고 1920년 프랑크푸르트로 이주하여 첫 성공을 거두었다. 카츠는 제3제국 기간 동안 갑자기 중단되었다: 카츠는 유대인과 사회주의자로서 국가 사회주의자에 의해 박해를 받았다. 1936년, 그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도망쳤고, 그곳에서 열악한 상황에서 사망했다.

한스 토마의 <전쟁>이다. 1907년.  전쟁은 타오르는 지옥을 남겼다. 동화적인 인물의 실루엣은 드래곤이 헬멧에서 분출하는 불타는 붉은 불에 대해 어둡게 상승한다. 엄격한 프로필 보기는 남자에게 흔들리지 않는 결단력의 모양을 제공하므로 극적인 움직임 감각이 사건을 피할 수 없게 만든다.

카밀 코로의 <이른 아침의 알반산이 있는 마리노의 풍경>이다.  1826-27년.  야외에서 빠르게 실행되는 이 오일 스케치는 작고 구릉지대의 구릉지대를 넓고 역동적인 브러시 스트로크로 포착한다. 페인트가 얇게 적용되었으며 빛과 그늘은 강하게 대조된다. 코로는 이탈리아에서 이 작품을 제작했으며, 1825년부터 1828년까지 지냈다. 그의 고전적 훈련은 회화 요소의 명확한 구성과 조화로운 비율에 반영된다. 코로의 초기 오일 스케치는 캔버스에 있는 풍경의 분위기를 포착하려는 시도에서 인상파들의 롤모델이 되었다.

프리드리히 오버벡의 <예술 종교의 승리>다. 1829-1840년. 나사렛의 이 프로그래밍 사진은 스테델의 창립 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예술의 역사를 해석한 것은 새로 설립된 연구소의 방 방문객들에게 교훈적인 영향을 미치기 위한 것이었다. 제작의뢰를 받은 오버벡은 동시대인들에게 "지금까지 살았던 가장 위대한 예술가"로 여겨졌다. 100명이 넘는 예술가들이 성모 마리아를 숭배하는 이 승리의 그림에 모였다. 이 예술개념은 진보적인 중산층 도시의 미래지향적 분위기에 맞지 않았고, 이 그림은 완성 된 후 격렬한 비판을 불러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