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미술관/슈테델 미술관(프랑크푸르트)

프랑크푸르트 슈테델 뮤지엄 2

boriburuuu 2019. 7. 31. 21:58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지리학자>다. 1669년. 지리학자는 나침반이 있는 지도에서 거리를 측정하고 있다. 이제 그는 생각을 잠시 멈춘다. 지구와 벽에 지도는 네덜란드가 개척한 지도 제작 기술의 상태를 나타낸다. 전자는 유럽의 해안선, 후자는 인도양을 특징으로, 국가의 해양 무역 기반 경제에 대한 물의 중요성. 그러나 이 작품은 초상화도 아니며, 이야기를 전하지도 않는다. 베르미어는 화가의 의미로 지리학자가 세상을 마음속으로 조사하는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노력했다.

얀 스틴의 <봉사하는 메이드와 손님이 함께 있는 숙소>다. 17세기 네덜란드의 풍속화가. 네덜란드의 여러 도시를 이동하며 작품 활동을 펼쳐 지역 화파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양식을 구축했다. 농민이나 중산층의 꾸밈없는 생활 정경을 위트와 해학으로 그린 그의 작품은 떠들썩한 웃음이 있는 동시에 현실에 대한 자각과 도덕적 비평의 뜻이 담겨 있다. 이 작품에서는 술취한 손님이 돈을 내밀며 메이드를 희롱하는 장면인데 도덕적 경계를 담고 있는 것이다.

피에트르 코드의 <음악가들>이다.

더크 할스의 <메리 컴퍼니>다. 1620년.


앙리 판틴 라투르의 <팬지와 정물>이다. 1892년. 
겸손하고, 품위 있고 순수한: 대중적인 속이 보라색, 팬지의 속을 묘사하는 방법이다. 여러 점토 냄비에 배치, 그들은 모든 방향으로 머리를 스트레칭. 위의 빛은 빛과 그늘의 대기 상호 작용을 허용하며, 흑백 배경과 함께 친밀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라투르는 세부 사항에서 평평한 브러시 스트로크를 사용하여 놀랍도록 활기찬 꽃꽂이를 만든다. 그의 꽃 정물은 그의 시간의 가장 사랑스러운 것 중 하나다.

앙리 판틴 라투르의 <꽃 정물, 하얀 꽃병에 가을국화>다, 1889년.  늦은 여름 꽃다발은 흑백 배경 앞에서 빨간색, 흰색, 분홍색으로 꽃을 피운다. 작가는 자신의 모티브를 간단하고 겸손하게 무대에 서게 한다. 19세기가 막을 내렸을 때 친구들 사이에서 인상파들은 회화 주제의 해체를 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판틴-라투르는 전통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장 위닉스의 <토끼와 새가 있는 정물>이다.

장 데이비츠 헴의 <과일과 파이와 고블릿이 있는 정물>이다.

스탈린부르크 초상화의 달인의 <프랑크푸르트의 스탈린부르크 가족의 개인 예배당의 제단 날개>다. 1504년.   '부자'로 알려진 클라우스 스탈린부르크와 그의 아내는 원래 십자가에 못 박히는 중앙 패널을 측면에 두 날개의 안쪽에 전체 길이와 거의 실물 크기를 묘사했다 . 전통적인 중세 기증자의 초상화 유형은 여기에 선도적인 귀족 가족의 명성을 위해 채택되었다. 전체 길이 형식으로, 그것은 더 일반적으로 귀족을 위해 예약된 회화 관습이었다.

스트라스부르 마스터의 <십자가의 준비: 그리스도의 안식, 십자가에 못박히는 그리스도, 십자가를 세움>이다. 1510-20년.  한 그림에 세 가지 열정 장면이 결합된 이 특이한 조합은 그리스도의 고통을 되돌아보고 구원을 가져다 준 사건을 명상하면서 눈을 돌아볼 수 있게 해 주며 시청자를 초대한다. 놀랍게도, 이 그림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전경과 중간지대는 카를스루에 열정의 방식으로 피사체의 15세기 중반 표현에 해당하며, 배경은 1510/20 경의 어퍼 리니쉬 페인팅 스타일과 유사하다. 이 패널은 아마도 기존의 오래된 작품을 보완하거나 모방하기위한 것이다.

루카스 반 발켄보흐의 <안트베르프의 근처 눈이 내리는 겨울 풍경>이다. 1575년.  16세기 풍경화에는 루카스 반 발켄보흐가 있으며, 숲의 풍경과 겨울 풍경등 획기적인 새로운 그림 유형을 개발했다. 겨울 풍경은 이전에 사계절의 주기의 일부로만 생각할 수 있었지만, 앤트워프의 반 발켄보르치의 겨울 전망은 그 자체로 회화적 발명품이다.  이 그림은 세부 사항과 특히 떨어지는 눈의 설득력 있는 표현덕분에 매력적이다.

루카스 반 발켄보르크의 <얼어붙은 스켈드와 안트베르프의 풍경>이다. 1593년.  앤트워프의 스헬드 강폭은 400m²입니다. 이른바 리틀 빙하기가 절정에 이르렀던 16세기 중반을 제외하고는 그런 강이 거의 얼어붙지 않는다. 루카스 반 발켄보르치는 추운 겨울날의 분위기를 뛰어난 기술로 포착했다. 짙은 눈 구름이 푸른 하늘을 번갈아 가며 수평선에 낮게 놓여 있는 태양은 긴 그림자를 투사하고 농민들은 제방에 불을 붙였다. 나무와 우아한 도시 거주자를 모으는 일꾼들은 놀이와 함께 얼음에 분주한 것을 보고 있다.

피터 폴 루벤스의 <하프를 연주하는 다윗왕>이다. 1616년.  루벤스는 앤트워프에서 가장 유명한 아티스트가 되었다. 작업장이 접수한 많은 커미션에 대처할 수 있도록, 그는 그의 조수들이 다양한 회화적 맥락에 통합할 수 있는 머리연구를 제작했다. 워크숍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머리 중 하나는 이 그림의 출발점이었다. 루벤스가 죽은 후 얀 보코스트가 왼쪽에 섹션이 추가되면서 노인의 머리에 대한 믿을 수 없는 연구는 다윗이 하프를 연주하는 시장화 가능한 그림이 되었다.

피터 폴 루벤스의 <성 케서린의 신비한 결혼식(앤트워프에 있는 어거스틴 아버지의 교회의 제단에 대한 컬러 스케치) 베르소, 두 기병 전투>다. 1628년.  루벤스는 일련의 스케치에서 그의 대규모 회화 커미션을 많이 개발했다. 양쪽에 그려진 이 패널은 1627/28년 앤트워프에 있는 아우구시니아 교회의 제단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렸다. 프랑크푸르트 스케치는 처음으로 전체 구성에 여러 개별 연구를 결합한다. 나중에 붙어 있는 나무 조각에 의해 심하게 손상된, 뒷면에 사자 사냥의 스케치는 프랑스의 헨리 IV의 종말로 마리아 드 메디치에 대한 1628 년부터 루벤스에 의해 실행 된 그림 주기에 대한 준비에 수행되었다.

더크 반 바부렌의 <웃는 남자>다. 1622년. 반 바부렌이 로마에서 돌아온 직후 에 이르는 이 그림은 북유럽 카라바기즘의 걸작이다. 위대한 이탈리아 바로크 화가 카라바지오의 영향은 클로즈업 뷰 (음악 책은 관객의 공간으로 바로 튀어 나온 것 같다), 영리하게 선택한 사진 세부 사항, 피사체의 표현 포즈와 물리학, 오늘의 연극 캐릭터를 연상시키는 의상, 그리고 조명이 정교함만큼 강력하다. 이 작품은 뮤지션의 반 길이 인물의 네덜란드 장르의 초기 예 중 하나다.

렘브란트 반 레인의  <젊은 여인의 초상: 헨드릭제 스토펠스>다. 1660년.

렘브란트의 <마에르트젠 반 빌더벡의 초상>이다. 1633년.  타원형 형식, 스파르타 스테이징 및 감소 된 팔레트로이 그림은 암스테르담 귀족의 구성원을 위해 반복적으로 사용 된 초상화 유형 렘브란트 를 나타낸다. 그는 젊은 아가씨의 특징을 렌더링하는 즉각적인 덕분에 모양이 인상적이다. 오픈 브러쉬워크는 그녀에게 생생함을 제공한다. 러프의 섬세한 패브릭과 보닛의 레이스 테두리 등 다양한 귀중한 직물을 표현하는 것은 작가의 회화적 세련미를 증명한다.

렘브란트의 <눈이 머는 삼손>이다. 렘브란트의 종교화 그림 중 유일하게 바로크적 인 격정을 담고 있는 작품으로 데릴라에게 속은 삼손이 블레셋 군인들에게 눈이 뽑히는 장면을 포착해 그린 그림이다. 진인한 폭력의 묘사, 대각선 구도, 빛과 어둠의 대비 등 드라마틱한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극적인 양식의 그림은 다시 찾아볼 수 없지만 이상화 되지 않고 현실적인 인물의 인간애는 쭉 이어진다. 한손에 머리카락과 또 다른 손에 가위를 들고 빛을 향해 달아나려는 데릴라와 고통스럽게 쓰러진 산손의 모습이 대비된다.

렘브란트의 <사울왕 앞에서 연주하는 다윗>이다. 1630-31년. 

드 겔더의 <제시스가 못생긴 노인을 묘사한 자화상>이다. 1685년.  드 겔더는 매력적이지 않지만 허세로 장식된 할머니의 초상화에서 벗어나 관람객에게 미소를 짓게 한다. 여기서 그는 골동품 화가 제시스의 역할을 맡는다. 전설은 후자가 자신의 모델의 끔찍함에 웃다가 죽었다는 것을 가지고있다! 브라운과 오렌지 색조로 줄어든 그의 팔레트와 페인트의 거친 적용으로 드 겔더는 1685년 더 이상 패션이 없었던 렘브란트의 후기 스타일을 고수했다.

아드리아앙 브로워의 <쓴 물약>이다. 1636-38년. 루벤스의 높이 평가받는 작가인 브루워는 1631년부터 앤트워프에서 조기 사망까지 일했다. 조잡하게 옷을 입은 젊은이의 이 반길이 그림은 아마도 브루워의 마지막 몇 년 동안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그의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다. 그 젊은이는 왜곡된 얼굴이 깊고 완전한 혐오감을 표현하기 때문에 분명히 쓴 약을 복용했다. 맛의 감각을 표현에서, 브로워는 회화 전통에서 현저하게 출발 : 맛은 일반적으로 짭짤한 음식을 먹는 수치에 의해 상징되었다.

아브라함 블로에마르트의 <바위를 때리는 모세>다.

얀 반 고엔의 <하를렘 호수>다.

제라드 터 보쉬의 <와인잔과 여인>이다.

한스 홀바인의 <그리스도의 열정, 프랑크푸르트 도미니카 교회의 높은 제단의 조각>이다. 1501년.

한스 홀바인의 <프랑크푸르트 도미니카 제단 조각의 외장 날개>다. 1501년. 첫 번째 오프닝 후 도미니카 제단조각이 보여준 열정 장면과는 달리, 우리가 닫혔을 때 보는 그림은 매우 이례적이다. 왼쪽에는 혈통의 창시자 인 제시 (Jesse)의 포도 나무가 생겨나는 반 길이의 인물로 표시된 예수 선조가 있다. 오른쪽은 창립자가 나온 포도나무로 연결된 도미니카 계급의 성도들을 보여준다.

필립 베이트의 <베르누스의 바로네스의 초상>이다.1838년.  프랑크푸르트 최고의 유행을 차려입은 젊은 아가씨가 스테델 감독의 모델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상원의원, 사업가, 미술 수집가 프란츠 폰 베르누스와 17세의 나이로 결혼한 마리 뒤 페이는 이곳에서 민감하고 실크같은 아름다움으로 소개된다. 베이트는 그녀의 옷의 다양한 질감의 세부 사항에 대해 전문적으로 정교하게 설명했다. 복잡한 헤어 스타일과 벽 디자인의 후반 고딕 양식의 장식은 중세 와 낭만주의의 매력의 표시다. 베르누스 가족은 많은 지식인, 음악가, 화가들이 만난 프랑크푸르트에서 중요한 살롱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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