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미술관/슈테델 미술관(프랑크푸르트)

슈데텔 뮤지엄3

boriburuuu 2020. 12. 23. 11:45

요한 하인리히 빌헬름 티슈바인의 <캄빠냐의 괴테>다. 1787년. 화가는 프러시아 궁정화가로서 이탈리아를 방문해 손꼽히는 신고전주의 화가가 되었다. 1786년 괴테와 함께 두번째로 나폴리를 방문하고 이들의 우정이 알려지면서 '괴테-티슈바인'이란 별칭을 얻었고 캄빠냐를 배경으로 고대 로마의 폐허 사이에서 기대고 있는 괴테의 우아한 모습은 티슈바인의 기량을 절정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호메로스 저작의 삽화를 통해 잘 알려진 티슈바인의 그림들은 신고전주의를 전파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도메니코 까글리오의 <프랑크푸르트 암마인의 전경>이다.

 

조셉 안톤 코흐의 <노아의 감사 제단>이다. 무지개를 보니 홍수가 끝난것을 감사하며 여호아께 감사의 제물을 드리는 모습이다.

안스트 드거의 <젊은 여인의 초상>이다.

요한 다비드 파사반트의 <로만 풍경에서 베레모를 쓴 자화상>이다. 1818년.  이탈리아의 태양 아래 독일의 화가이자 미술 사학자인 파사반트는 자신의 우상인 라파엘의 스타일로  집에서 자신을 그린다. 1817년부터 그는 이탈리아에서 10년간 살았으며 나사렛에 속했다. 그리스도교를 통한 예술의 갱신에 대한 그들의 믿음은 로마의 이아텐 폐허와 배경에 기독교 교회의 병치에 예시된다. 1840년 파사반트는 예술 활동을 끝내고 스테델 박물관의 감독직을 맡았다.

에드가 드가의 <오케스트라 뮤지션>이다. 1872년. 이것은 원래 수평 형식의 그림이었다 : 중앙에 오케스트라 구덩이의 음악가, 배경의 무대에서, 발레 댄서, 자신의 몸의 하반부만 볼 수 있다. Degas는 나중에 양쪽의 캔버스를 다듬고 상단을 확장했다. 따라서 개정 된 버전에서, 뮤지션에 대한 초점은 무대와 무용수를 포함하도록 확대되었다. 이 작품은 드가가 자신의 장면을 프레이밍하는 그의 특이한 방법으로 오늘날 잘 알려진 발레 묘사의 긴 시리즈를 시작한다.

클로드 모네의 <잔강의 둑의 집들>이다. 1871년.  클로드 모네가 런던에서 망명을 하려던 프랑코-프로이센 전쟁 직후, 작가는 네덜란드로 여행했다. 그와 그의 가족은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있던 자안담이라고 불리는 암스테르담 근처의 작은 마을에 머무르는 동안 피신했다. "화가의 삶 전체를 위해 바쁘게 지내곤 할 것"이라고 그는 친구 카밀 피사로에게 편지를 썼다. 파리가 폐허가 된 동안 모네는 행복한 풍경을 묘사했다. 여름날의 부드러운 빛이 잔강 강 둑의 물에 반영된 그림 같은 주택에 반짝인다. 작가는 인상파 브러시 스트로크로 이 목가적인 장소의 평온한 분위기를 포착한다.

클로드 모네의 <점심식사>다. 1868-69년.   오찬 동안 그의 가족, 손님 과 하녀를 보여준다. 모네가 몇 달 후 '라 그누일레'에 적용할 자유주의적 붓작업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이것은 일상 생활에서 개인 장면이지만, 작가가 선택한 거의 기념비적인 형식은 역사 회화의 위상을 높인다.

샤를 프랑수와 도비니의 <프랑스 과수원>이다.

알프레드 시슬리의 <가을 풍경>이다.

오귀스트 르노와르의 <오찬 후>이다. 1879년. 파리 레스토랑의 아부르에서 풍성한 식사가 막을 내리고 있다. 여배우 엘렌 안드레는 저녁 식사 후 음료의 마지막 한 모금을 마셨다. 생각에 잃어버린 그녀는 남아있는 취향에 집착한다. 르누아르의 모델 중 하나는 벤치 뒤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작가의 동생이 담배에 불을 붙이는 모습을 지켜보며 만족감을 느낀다. 그렇지 않으면 활기찬 대화에 중단이 있다. 훌륭한 숙달력으로 르누아르는 캔버스의 일시적인 인상을 자연스러운 "스냅샷"으로 포착했다.

오귀스트 르노와르의 <독서하는 소녀>다. 1880년. 어린 소녀는 그녀가 읽고있는 그림책에 매료되었다. 꽃이 만발한 작은 진달리 나무와 밀짚 모자가 꽃으로 장식되어 있고 생생하고 빠르게 적용된 브러시 스트로크는 그녀의 얼굴을 강조한다. 섬세하게 묘사 된 안색은 주변환경과 어긋나며 커튼과 창문이 순수한 페인트 물질로 줄어든다. 배경은 추상화에 직전. 활기찬 활기의 이 설정 의 중간에, 소녀는 차분한 앵커와 집중의 전형 역할을한다.

에드워드 마네의 <크로켓 게임>이다. 1873년. 네 명이 크로켓 게임을 위해 모였다: 전경에 앉은 사람은 마네의 동료 예술가 알프레드 스티븐스다. 배경에는 그의 친구 폴 루디어가 있다. 그 사이에는 인상파를 위해 포즈를 취한 모델 앨리스 레쿠베와 빅토리안 뮤렌트가 있다. 마네는 여기에서 인상파 스타일에 거의 가까워지지 않았다. 회화 구조와 브러시 스트로크가 자발적으로 나타나더라도 작업을 신중하게 계산했다. 도발은 의도적이었다 : 두 결혼한 부부처럼 보이는 것은 예술가와 그들의 모델로 밝혀졌다. 부르주아 목가적인 것은 단순한 환상이다.

로비스 코린트의 <겨울철>이다.

 

로비스 코린트의 <카르멘시타>다.

폴 세잔의 <로키 산맥의 나무와 도로가 있는 풍경>이다. 1870-1871년. 전경에 도로가 열리지만 나무와 바위는 시골의 전망을 모호하게 한다. 나무의 뚜렷한 그림자도 장벽처럼 보인다. 공간 적 깊이를 제안하는 대신, 회화 요소는 2차원으로 나타나며, 이 효과는 광범위하고 리드미컬한 브러시 스트로크로 악화된다. 관중을 끌어들이고 동시에 그림에 대한 접근을 거부하는 긴장감의 상태는 수많은 인상파 작품에서 찾을 수 있다.

유진 드라클루와의 <묘지의 햄릿과 호라티오>이다. 1835년.  무덤에서 어린 왕자 햄릿과 그의 친구 호레이스는 죽음과 일시성에 명상한다. 장례 행렬이 나타날 때만 햄릿의 사랑하는 오펠리아를 호위하며 마지막 여정에 안내하고, 그들은 그 옆에 있는 무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호레이쇼는 단단히 서서 높은 위치에 서 있으며,  두개골을 손에 들고 있는 왕자는 경사진 돌 석판에서 무덤으로 거의 미끄러져 자신의 임박한 죽음을 언급한다. 파리 살롱의 심사위원단에 의해 거부된 이 그림에서 델라크루아는 셰익스피어의 주인공들을 민감하고 우울하며 고립되고 내성적인 로맨틱 영웅으로 묘사한다.

유진 드라클루아의 <아랍계 판타지아>다.  1833년. 이 그림은 모로코 여행 후 1년 후에 실행되었다. 역동적인 움직임이 묘사를 지배한다. 이 드라마는 격동의 질주하는 스티드와 전경의 베두인의 대조를 이루는 느슨한 브러시워크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이들은 침착하게 진행을 지켜보고 있다. 그의 회화 스타일로, 델라크루아는 어떤 예술이 선의 선명도로 특징지어진가에 따라 고전학문적 전통에 대항하여 입장을 취했다.

아놀드 뵉클린의 <바닷가 집>이다. 1874년.  어두운 구름, 바람에 흔들리는 사이프러스, 붉은 저녁 하늘에 바다 옆에 있는 빌라의 고독의 은유를  극적인 설정으로 차용했다. 돌아오는 여성은 마치 무대에 있는 것처럼 해변에 서 있다. 그녀의 손에 머리를 쉬고 있는 신체의 우울한 자세는 그녀의 망토 아래에서 추적 할 수 있다. 이 주제는 다섯 가지 버전의 세 번째 버전으로, 이는 작가에게 매우 중요했다.

<여배우 페니 야나우섹의 초상화>다. 1861년.   사랑받는 패니 야나우섹은 무대의 스타였다. 뵈클린은 1861년 바이마르에서 열린 게스트 공연에서 프랑크푸르터 여배우를 만났다. 이곳은 그가 이 보다 더 큰 초상화를 그렸던 곳이다. 그녀의 유명한 아름다움을 강조하지도 않으며, 캐릭터의 극적인 초상화도 아니다. 수수께끼의 마임은 연극보다는 예약된 것 같다. 뵈클린은 여배우의 특별한 자질을 강조하는 데 성공했다: 비극이 된 그녀는 최대의 고통을 완벽하게 통합한다.

떼오들 리보의 <빈병>이다.

장 레온 제롬의 <성 제로니무스>다

막스 리베르만의 <삼손과 데릴라>다. 1902년.  데릴라가 승리의 제스처로 자른 삼손의 머리카락 트로피를 아군에게 선물한다. 그녀가 잘라서 무적의 힘을 빼앗긴 남자는 그녀의 무릎에 침몰했다. 리버만은 남녀의 현대 투쟁으로 구약의 이야기를 무대에 올렸다: 벌거벗은 몸은 흰색 시트와 회색 벽의 탁 트인 배경 앞에서 극적인 포즈를 취한다. 데릴라는 그녀의 연인을 무력화 시키는 팜므 파탈이다. 이러한 강한 여성 인물은 세기의 전환기에 대중의 상상력을 사로 잡았다.

막스 레베르만의 <암스테르담의 고아원 안뜰>이다.   1881-82년.   리베르만은 암스테르담에서 '버거위슈이스'의 수감자들을 스케치했다. 그는 뮌헨 스튜디오에서 유화를 실행한 것은 나중에야. 이 작품은 리버만이 현실주의 단계의 갈색 음영을 남기고 인상주의의 밝은 팔레트를 채택했을 때 전환점에서 만들어졌다.

프란즈 빌테르한터의 <올가 봉 그루넬리우스의 초상>이다.

귀스타프 쿠르베의 <작셍하우스에서 올드 브릿지와 프랑크푸르트의 전망>이다. 1858년.  이 그림은 1858/59년 프랑크푸르트에 머무는 동안 쿠르벳이 그린 작품 중 하나이며, 그 때 그는 이미 유명한 예술가였다. 그의 스튜디오는 브뤼켄슈트라세의 도이치코르덴하우스에 있는 작센하우젠에 위치했다. 거기에서, 하나는 메인 리버의 전망을 했다 그리고, 먼 쪽에, 성당. 황량한 마을은 마치 무대 배경처럼 이상하게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그의 사업에 대해 가는 유일한 사람은 외로운 어부다. 묘사는 파노라마의 지형적으로 정확한 렌더링이 아니라 꿈꾸는 분위기를 포착한다.

귀스타프 크루베의 <파도>다. 1869년.  천둥같은 파도가 관객을 향해 직접 굴러가서 그를 난류 바다로 데려가겠다고 위협한다. 쿠르벳은 노르망디 해안에서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씨에 60번 정도 이 자연의 광경을 그렸다. 1865년에서 1870년 사이에 실행된 이 시리즈는 이미 동시대인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섬세한 팔레트 외에도 파도 그림의 상징적 수입에 매료되었다. 해방된 자연은 삶의 투쟁에 대한 은유일 뿐이다. 쿠르벳의 경우, 파도는 폭력과 파괴뿐만 아니라 창조와 갱신을 의미했다.

귀스타프 쿠르베의 <겨울의 마을 풍경>이다. 1868년.  대각선 길을 따라, 관객의 시선은 희소하고 겨울 장면에서 버려진 집을 지나 그려진다. 가파른 바위 산이 갑자기 시야를 차단한다. 구스타브 쿠르벳의 고향인 오르난스의 유라 산맥이다. 풍경의 가혹함은 페인트의 임파스토 적용에 의해 밑줄이 있다.  조경가로서 쿠르벳은 인상파를 중요한 롤모델로 삼고 있다. 그와 클로드 모네는 1862년에 만났고, 1870년 쿠르벳은 모네의 결혼식에서 최고의 남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