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튀르키예 서부 성지 25년

제 4일 이즈미르 와 교회들

boriburuuu 2025. 5. 8. 13:14

호텔에서의 식사는 전날 필요한 것을 체크해 달라고 하더니 방으로 조식을 가져다 주었다. 빵과 치즈 잼 등으로 이루어진 식사였지만 민족스러웠다. 하루의 시작을 성 폴리캅 교회와 함께 했다. 사도 요한의 제자였던 폴리캅은 로마의 박해에 맞서 끝까지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순교한 인물로 로마 황제를 신이라고 고백하기만하면 살려주겠다는 서머나(이즈미르) 총독의 요구를 물리치고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 폴리캅(서머나)교회는 요한 계시록의 7대 교회 중 하나로 계시록에 두번째로 등장한다. 지금의 교회는 성 폴리캅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내부에 그의 순교 장면을 그린 벽화가 있다고 하는데 내부 공사중으로 문을 닫고 있었다.  .  

이즈미르는 터키 3대 도시로 많이 개발되고 발전하다보니 과거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운 단점을 갖고 있었다. 

이즈미르 아고라로 갔다. 무려 알렉산더 대왕 때 조성된 시장이라고 한다. 178년 대지진으로 무너진 것을 로마 황제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가 재건축했다. 

지금은 성지 순례시 성 폴리캅 교회를 서머나 교회라 생각하고 방문하지만 진짜 그 시절의 서머나 교회는 이 아고라의 어느 지역에 있었을 것이다. 

아치를 상당히 복원해 놓은 모습이다. 

2천년된 물길이 아고라를 가로 지르고 있다. 

위에서 내려다 본 아치들의 모습이다. 위로는 코린트식 기둥들이 줄지어 서 있다. 

과거와 현대가 같이 공존하는 모습이다. 

바닥에는 모자이크가 남아 있다. 

유적들을 모아 놓은 모습인데 언젠가 다시 방문하면 더 많은 복원이 이루어져 있겠지?

뒤쪽으로 이슬람 묘석들이 줄지어 놓여 있는데 한 때 이곳을 공동 묘지로 사용해서란다. 

차로 1시간 13분을 달려 지금 터키의 아키사르라는 곳에 있는 두아디라 교회로 갔다. 

버가모와 사데 사이의 교통 요지인 두아디라는 작은 도시였지만, 셀류쿠스 1세가 유대인들을 집단으로 이주시키며 상업 도시로 크게 번성했다. 당시 최고 권력자들이 애용한 자주색 옷감을 염색하는 기술이 발전된 곳으로, 자신의 집을 헌당해 빌립보 교회를 세운 루디아의 본가가 있는 곳이다(행 16:11-15). 고도로 상업이 발달한 두아디라에서 경제생활을 영위하려면 해당 업종의 ‘길드’에 소속돼 있어야 했다. 길드는 티림노스 신전과 긴밀히 연결돼 길드원들이 이 신전을 경제적으로 후원하고 신전의 창기들과 음행을 즐기는 경우가 빈번했다. 집단 이주해온 유대인들은 대부분 섬유업 길드에 소속됐고, 음란한 이방 제사를 드리는 자들도 많았다.

그러나 두아디라 교회 성도들은 ‘사업’, ‘사랑’, ‘믿음’, ‘섬김’, ‘인내’에 대한 칭찬을 받았다. 여기 ‘사업’은 헬라어 ‘에르곤’(ἔργον)으로, 사역을 의미한다. 두아디라 교회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교회 생활뿐 아니라, 사회에서도 본이 되며 사람들을 섬기는 사역을 성실하게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진을 찍다가 조카 성은이가 다니는 교회의 목사님을 만났다. 7대 교회와 계시록에 관한 책을 쓰려고 하시는데 사진 자료가 부족해 주중에 잠깐 나오셨다고 하신다. 기념으로 우리 사진도 찍어 주셨다. 

사진을 찍다보니 누군가 한국말로 말을 걸어온다. 튀르키에 아가씨인데 독학을 했다는데 우리 말을 아주 잘했다. 인터뷰를 요청해서 흔쾌히 응했다. 대학생들로 이곳을 방문했을 때의 느낀점, 보완했으면 하는 점등을 말해 달라고 해서 안내 표시나 설명 등이 보완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말해 주었다. 

다음으로 방문한 곳은 빌라델비아 교회(성 요한교회)였다. 빌라델비아는 주후 150년경 버가모 지역을 다스리던 아탈루스 2세 빌라델브스가 자신의 동생을 위한 도시로 개발했다. ‘사랑’이라는 뜻의 헬라어 ‘필로스’(φίλος)와 ‘형제’라는 뜻의 ‘아델포스’(άδελφός)가 합쳐져 ‘형제 사랑’이라는 의미의 이름이다. 비옥한 토지와 상업에 유리한 입지로 짧은 기간에 성장해 소아시아 지역을 대표하는 큰 도시가 되었고, 이 지역의 유대 공동체는 상인 길드를 바탕으로 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빌라델비아는 지진이 자주 발생한다는 치명적 문제가 있었다. 주후 17년과 23년에 큰 지진이 일어나 도시가 황폐해졌고, 계속된 여진으로 점차 몰락해갔다. 로마의 티베리우스 황제가 빌라델비아의 세금을 감면해 주자 빌라델비아의 시민들은 황제를 섬기는 신전을 여러 군데 건설했다.
빌라델비아의 초대교회는 유대인 경제공동체에서 추방당한 상태였다. 유대인 길드들은 기독교인에게 일을 주지 않았고 회당 출입을 금지했으며, 로마인들에게 기독교인들을 고발해 박해하였다. 당시 회당 출입 금지는 유대인 커뮤니티의 전 기능에서 추방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빌라델비아 교회는 세력이 매우 미약했다. 이런 배경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열린 문”의 축복을 주셨다(요 10:1-15). 비록 유대인들의 회당은 초대교회 성도에게 닫혀 있었지만, 천국의 문은 성도에게 활짝 열려 있다는 말씀이다(계 21:12-14).

지금은 이렇게 큰 기둥만 남아 그 규모를 짐작하게 할 따름이다. 

빌라델비아 교회를 보고난 후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을 찾는데 한 소녀가 우리를 유혹한다. 꼬마 아가씨의 미소에 끌려 안으로 들어가니 라마단 기간이라 다른 음식은 안되고 괴즐레메만 가능하단다. 괴즐레메는 튀르키에의 빈대떡으로 솥뚜껑 같은 열판에 얇은 밀가루에 안에 치즈와 시금치 같은 야채를 넣고 부쳐내는 것이었다. 가격을 물으니 70리라라고 해서 두장을 시켜 먹고 아이란을 하나씩 먹어 보았다. 

한나가 아이를 보고 차에 가 사탕을 가져다 주었는데 라마단 때문인지 입에도 대질 않는대. 아차 싶었다. 200리라 지폐를 내미니 계산을 잘못 해서인지 너무 많은 거스름돈을 줘서 한바탕 실랑이를 하고 결국  130리라를 지불했다. 주인 아주머니는 신기한지 사진을 같이 찍자고 요청했다. 

사데로 향했다.  유대인 회랑과 김나지움을 먼저 방문했다.  먼저 사데에 대한 설명을 보았다. 리디아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금화를 만들어 이웃 도시국가들에게로 보급했던 나라이다. 당시 리디아보다 문명이 앞서 있던 히타이트나 이집트에서도 동전을 만들어 사용하지는 않았는데, 리디아 왕국이 금과 은으로 만든 동전을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이 동전에는 사데의 왕실 휘장이었던 사자 머리 모양이 새겨져 있었다. 이에 리디아 마지막 왕이었던 크로에수스는 순수한 금과 은으로 동전 화폐를 만들어 전 세계에 보급하였고, 최소한 10톤의 황금을 쏟아 부어 에베소에 호화로운 아르테미스(아데미) 신전을 건설하고 치장했는데 서양에서 ‘크로이소스만한 부자’라는 표현은 자신의 부를 과시하는 사람에게 자주 비유되고 있다. 금화 주조에 사용되었던 금은 근처의 미다스 왕이 목욕했다는 팍톨루스(Pactolos) 강에서 사금을 채취하여 만든 것이다.

이곳은 아고라 지역이다. 약 33개 정도의 점포와 목욕탕 등이 잇었는데 이해를 돕기 위해 그림으로 설명해 놓아 좋았다. 

유대인 회랑으로 들어가 보았다. 기원 후 3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회랑은 세계에서 가장 크다고 하며 현재 지붕은 남아 있지 않지만 대리석 벽면의 일부와 바닥 모자이크 등이 잘 남아 있었다. 

바닥 모자이크도 색상이나 돌의 크기 등을 감안할 때 상당히 부유하고 권위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형테의 대리석 벽으로 이루어져 있었을 것이라고 설명하기 위해 붙여 놓은 것 같았다. 

김나지움 체육관의 모습이다. 그 당시 사람들은 체력은 국력이고 건강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도 깃든다고 믿고 있었기에  아주 중요한 곳이었을 터이다. 

아르테미스 여신전이다. 주전 330년대 알렉산더대왕의 명령으로 건축이 시작된 이 신전은 ‘다산(多産)과 풍요의 여신’을 위한 것이었다. 전면의 폭이 50m, 길이가 100m, 78개의 석주가 늘어선 웅장한 규모이다. 지금도 수십 개의 크고 작은 석주들이 도열해 있고 특별히 이오니아식의 석주 두 개가 18m나 되는 높이로 하늘을 찌를듯이 솟은 채 남쪽 끝 부분에 남아 있다

 

사데(Sardis) 교회는 AD 1세기 중반에 이루어졌다고 보는데, 그리스어로 된 메노로지온(Menologion)에 의하면, 바울의 제자이며 일곱 집사 중의 하나인 클레멘트(Clement)가 처음 사데 교회의 감독이었다고 한다. 초대교회 박해시에 사데에서 순교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는데, 그들 중에 테라폰(Therapon)과 아폴로니우스(Apollonius)가 있다.
2세기경 사데(Sardis) 교회의 감독은 멜리톤(Meliton)인데, 그는 기독교 신앙을 대변하기 위해서 로마의 마라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에게 많은 편지들을 써서 보낸 사람이며, 예루살렘을 처음으로 순례한 사람 중 한 사람이다. 멜리톤이 사데 교회의 감독이었을 때 교회의 명성을 크게 떨치게 되었다고 한다.
 사데 교회는 이 도시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크게 부흥 하였다가 나중에는 쇠퇴하는 우여곡절을 경험한다. 사도 요한이 사데 교회에 편지를 쓸 당시의 교회지도자는 누구였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처음에는 아데미신전을 빼앗아 예배드리다가(4세기경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한 후 권세를 얻었을 때쯤)후에 신도의 숫자가 작아져 아데미신전 담 밖에 돌담을 싸놓고 예배드린 것 같다고 한다. 초기 기독교 당시 신도 수는 매우 많았으나 영적으로는 미약하였다. 때문에 "너는 살아있다고 말하나 실은 죽어가고 있다!"란 책망을 받았다. 사데 지역은 황금이 많은 지역으로 재물의 유혹이 있었고 또한 아데미 여신을 섬기는 신전이 있어 신앙생활에 큰 어려움이 있었다. 현재의 사데교회 유적은 아데미 신전 뒤편에 비잔틴 시대에 벽돌로 지은 교회이다. 전체를 찍은 사진이 빈약해 인터넷에서 사진을 가져왔다. 

기둥의 크기를 보아 아르테미스 신전의 규모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신전 앞 산의 모양이 특이하다. 토물로스 산의 요새다.  페르시아의 고레스왕이 사데성을 포위했을 때 크로이수스와 사데 사람들은 개의치 않았다. 난공불락의 요새와 같은 트몰루스산에 숨어있기만 하면 문제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 난공불락의 요새와 같은 트몰루스산에 숨어있기만 하면 살 수 있다고 자부하는 사데사람들을 가리키며 고레스왕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너희들은 살았다고 하지만 사실은 죽은 목숨이다.”  고레스는 14일간을 포위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다음에“사데성으로 들어갈 방법을 찾아내는 사람에게 특별상을 주겠다고 했다. 어느 날 히에로에데스(Hyeroeddes)라고 불리는 한 군인이 사데성의 발포대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 때 사데 군병의 한 명이 실수하여 자기 철모를 성벽 총구 너머로 떨어뜨리고는 그것을 찾으려고 절벽 아래로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히에로에데스는 그 곳에는 몸집이 작은 사람이면 기어 올라갈 수 있는 틈바구니가 바위 사이에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날 밤 일단의 페르샤 군인들이 그 바위의 갈라진 틈바구니를 통해 사데성으로 침입할 수 있었다. 그들이 발포대 위에 도달했을 때 그 곳에는 보초병 하나 없었다. 사데 사람들은 발포대에 보초가 깨어서 경계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안전하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결국 다 잠자고 있다가 사데는 함락된 것이다

이 기둥과 기둥 받침대를 보라. 

서둘러서 셀축으로 이동했다. 셀축의 숙소는 레스토랑을 겸하고 있는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