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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일 성모 마리아의 집, 쉬린제 마을, 파묵칼레로 이동

boriburuuu 2025. 5. 9. 14:32

 성모 마리아가 생의 마지막을 보내고 승천했다는 ‘성모 마리아의 집’(House of Virgin Mary)을 찾아 나섰다. 그런데 구글이 또 우릴 에페소 유적지로 안내하는 것이었다. 그 안에 성모 마리아교회가 있어서인가보다. 주차비를 150리라 달라길래 나간다고 하고 언덕 길에 정차를 하고 들어가려하니 티켓이 이미 사용되었다며 거절이다. 우린 아니라고 항변했는데 어제 10시쯤 사용했단다. 우린 어제 에페스 유적지에 갔었다고 하니 여기가 거기라고 해서 한참 웃었다. 어제 우린 남문으로 들어갔고 여기는 북문이었던 것이다. 한바탕 웃고는 다시 검색해서 성모 마리아의 집을 찾아갔다. 

가는 길에 황금빛 성모상이 서 있었다. 

드디어 도착해서 주차하려 하니 뮤지엄패스도 되질 않고 1인당 500리라씩 내야한단다. 너무 비싸니 깍아달라고 하니 500리라만 받고 통과를 시켜주었다. 나중에 보니 입장료는 따로 없으나 지역사회에 기부하는 형식이었다. 

입구에 예수의 탄생 장면을 재현해 놓았다. 

거대한 침례소가 마련되어 있었다. 

한참을 걸어 올라가다 보니 오래된 올리브 나무들이 가로수처럼 서 있다. 

올리브 나무는 3천년까지도 산다고 하는데 이건 족히 몇백년은 되어 보인다. 

집의 안내문이 세계 각국의 언어로 써 있는데 물론 한글로 된 것도 있었다. 

또하나의 아름다운 성모상이다. 

이 올리브나무는 연리지처럼 생겼다. 

드디어 성모 마리아가 여생을 보낸 곳에 도착했다. 44년 경 박해를 피해 사도 요한과 에페스로 온 그녀는 뷜뷜 산중에 집을 짓고 기도하는 삶을 살았다고 한다. 

내부의 모습이다. 안쪽은 사진 촬영이 불가해 사진이 없다. 

19세기에 독일 뒬멘(Dülmen)이라는 농촌 마을에 안네 카터리네 에메리히(Anne Catherine Emmerich)라는 수녀가 있었다. 그 수녀는 꿈 속에서 성모 마리아의 계시를 받고, 마리아가 승천한 곳의 위치와 교회의 모양을 보았다.
그녀는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 있었는데, 독일의 시인이자 작가인 클레멘스 브레타노(Clemens Brentano)라는 사람이 수녀를 찾아가 5년동안 그녀의 증언을 듣고 기록해 두었다. 브레타노는 수녀가 꿈 속에서 계시 받은 내용을 정리해 1852년에 ‘성모 마리아의 생애’라는 책을 출간했다.
에메리히 수녀는 한번도 독일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성모 마리아 거주지와 승천 장소에 대한 내용을 정확하게 구술했다. “성모 마리아는 에페수스에서 3시간 반 걸리는 시골에 살았다. 마리아의 거주지는 높은 언덕에 있는데, 예루살렘에서 오는 길의 왼쪽에 있다. 에페수스에 서남쪽의 가파른 야산을 오르면 있다.”
에메리히는 그 집의 구조가 직사각형 석조물이고, 창문은 높고 지붕은 평평하며, 집으로 들어가는 길은 두 개가 나 있다는 등, 구체적인 내용까지도 꿈에서 본 대로 서술했다. 문의 위치, 굴뚝의 형상등도 설명했다.
1881년 라자로 교회의 아베 줄리앙 구예(Abbé Julien Gouyet)라는 프랑스 신부가 브레타노의 책을 읽고 탐사반을 이끌고 현지를 답사했다. 놀랍게도 구예 신부는 에메리히 수녀가 서술한 내용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유적지를 발견하게 되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구예 신부의 발견은 그다지 중요하게 부각되지 않았다.
10년 후인 1891년 7월 29일 프랑스의 마리 드 망다 그랑시(Marie de Mandat-Grancey) 수녀를 비롯해 폴린(Poulin)과 융(Jung) 등 라자로 교회 신부들이 구예 신부의 발견 기록을 보고 그 유적지를 다시 찾았다. 이들은 폐허가 되어 지붕도 없는 이 돌집이 오랫동안 그곳 주민들에게 거룩한 장소로 여겨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곳 주민들은 초대 교회 시절 에페수스에 살던 기독교인의 후손들이었다. 그들은 그곳을 터키어로 ‘동정녀의 문간’(Panaya Kapulu)이라고 부르며, 성모 승천을 기념하는 8월 15일에 이곳을 성지 참배를 해 왔다.
‘성모 마리아의 집’을 다시 일으킨 사람은 그랑시 수녀였다. 그랑시 수녀는 그 집을 매입하고 복구하고 보존하는데 매진했다. 그랑시 수녀는 이곳 마리아의 집에 조그마한 가톨릭 성당을 하나 세웠다. 1896년 교황 레오 13세와 1961년 교황 요한 23세가 예루살렘에 있는 성모 마리아가 선종한 장소로 전해지는 성당(마리아의 무덤)에 대한 권위를 폐지하는 한편, 에페수스의 ‘마리아의 집’에 순례 성지로서의 권리를 부여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1967년 7월 26일 마리아의 집을 방문한데 이어 1979년 11월 30일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문함으로써 성지로서의 정통성을 인정했다. 2006년 11월 29일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터키 순방 중에 4일째 되는 날에 에페수스를 찾아 동정 마리아의 집을 방문하여 미사를 집전했다.

이것은 성수라고 한다. 바르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데 손만 씻고 말았네.

소원의 벽이다. 많은 사람들이 소원을 적어 꽂아 놓고 있었다. 

예정에는 없었지만 어제 에피스를 본터라 쉬린제 마을을 방문했다. 

쉬린제의 역사는 15세기 터키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그리스인들이 노예의 속박에서 풀려난 후 정착하면서부터 시작된 정착촌으로써 오스만제국이 무려 400년 간이나 그리스를 식민지로 지배하는 과정에서 많은 그리스인들이 살았기에 고향에 돌아 갈 엄두를 못내 어느 산골로 들어가 그들의 고향과 비슷한 곳에 고향집을 떠 올리며 돌을 쌓아 회를 바르고 빨간 기와를 얹어 그리스 마을을 만든 슬픈 역사가 있는 곳이다.  오스만제국이 이곳을 점령한 이후 15세기에 에페수스(Ephesus) 지역에 거주하던 그리스인 해방 노예들이 지배민족인 터키인들이 살지 않는 산간으로 이주해 형성한 마을이였으며 그리스인들은 터키인들이 접근을 기피하게 하기 위해 터키어로 ‘더럽고 추하다’(ugly)는 의미의 치르킨제(Çirkince)라는 지명을 사용했다고 한다.

튀르키예-그리스 전쟁이 끝나고 그리스인들이 1923년 민족교환 조약에 의해 이곳을 빠져 나가면서 페허가 되었다. 당시 조약에 의해 터키에 살던 그리스인 122만명, 그리스에 살던 터키인 35만~40만명이 서로의 조국으로 돌아갔는데, 양측 모두 합해 160만명의 민족 대이동이 있었다고 한다. 1926년에 이즈미르 주정부는 폐허가 된 마을의 이름을 튀르키예어로 ‘즐거움’(Pleasant)을 의미하는 쉬린제(Şirince)라는 이름으로 바꾸었지만 아무도 들어와 살려 하지 않았다고한다. 그후 1990년대에 거의 폐가가 된 가옥에 튀르키예 언어학자 세반 니샨얀 (Sevan Nişanyan) 부부가 정착해 그리스인들이 남긴 유산을 이어갔으며 그들은 마을을 리모델링하고 개조해 튀르키예인들의 이주를 받아들여 마을을 회생시켰는데 현재 주민은 약 600명이며 모두 튀르키예인들로써 그리스인들이 하던 산업을 이어받아 직접 재배한 올리브 제품, 포도주, 포도, 사과, 복숭아를 이용한 과실주, 수공예 레이스 등을 생산하면서 관광객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쉬린제마을의 주민들은 모두 튀르키예인이지만 실제로는 그리스계로써 당시 무슬림이라 인구교환에 해당되지 않은 주민들의 후손들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언덕위에 하얀집에 빨간 지붕, 소박하고 여유로워 보이는 쉬린제 마을의 가옥들은 튀르키예 공화국이 수립되기 이전에 그리스 사람들이 살던 곳인지라 아직도 그리스 양식의 가옥들을 다수 찾아볼 수 있으며 그리스풍의 전통가옥 풍경이 아름다워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

일정을 마무리하고 파묵칼레로 이동했다. 파묵칼레의 숙소는 터키에서 가장 크고 좋은 숙소였다. 이틀밤을 그곳에서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