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그리스

제3일(06.15) 델포이 유적과 박물관,테르모필레 전투 터, 메테오라로 이동

boriburuuu 2018. 8. 19. 23:18

 호텔에서 아침을 먹자마자 체크 아웃을 하고 델포이유적을 보러 갔다. 여기서도 길을 찾느라 언니와 설왕설래를하고 왔던 길을 되돌아 가는 헤프닝이 있었다. 제우스 다음으로 신계의 2인자가 된 아폴로는 위상을 높히기 위해 신탁소를 세울 장소를 물색하던 중 마음에 드는 땅은 이미 요정 발푸사의 것이었고 발푸사는 "내 땅은 사람과 동물들로 시끄러우니 더 나은 곳을 찾으라"며 꼬드긴다. 파르나미스 산 밑에 신탁소를 세우기로 하고 그곳의 성질 포악한 뱀 퓌톤(대지의 여신 가이야의 딸)을 죽여 대지의 여신의 분노를 산다. 제우스는 아폴로에게 템페강에서 목욕하고 사죄할 것을 명하고 이후 델피에서 8년에 한번 퓌톤에게 제사를 지내게 된다. 델푸사에게는 샘에 맹수를 보내고 샘물을 메워버렸다고 한다.

델피는 기독교의 이교 금지 정책으로 전설속의 도시가 되었지만 1829년부터 시작된 프랑스 학자들에 의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그리스의 역사에서 가장 신성한 땅으로 꼽힌 곳이 바로 이곳 델포이다. 세상의 중심이라고 여겨졌던 이곳에는 오래전부터 전해져 오는 신화가 있다. 제우스가 세상의 중심이 어디인지 알아보기 위해서 올림포스 산에서 독수리 두 마리를 세상의 양쪽 끝 방향으로 날려 보낸 후, 두 마리의 독수리가 만나는 곳을 세상의 중심으로 정했는데, 그곳이 바로 델피, 델포이다.  그래서 지구의 배꼽인 옴파로스가 있다.

아폴론 신전으로 신탁을 받으러 올라가는 길을 신성한 길이라고 하는데 수 많은 국가와 도시에서 온 사람들이 머무를 수 있는 공간과 신탁을 받은 감사의 뜻으로 바친 보물 창고들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세상의 중심, 배꼽이라고 믿었던 옴파로스인데 이것은 모조품이고 진짜는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여러 보물 창고 중 가장 잘 복원된 아테네의 보물창고이다. 세로 10m, 가로 6m의 작은 규모지만 도리스식 기둥 등에서 예전의 화려한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남쪽 벽에는 아테네가 마라톤 전쟁에서 승리한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아폴론에게 보물 창고를 헌상한다는 글이 새겨져 있다는데 내부는 공개하지 않고 있었다.

 

 

 

 

 

 

 

아테네인들의 스토아이다. 페르시아 전쟁의 승리 이후에 BC478년에 세워졌다고 한다. 현재는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하단 부분 흔적만이 남아있다. 원래는 이오니아 양식의 8개 기둥이 세워져 있었고, 지붕은 목재로 만들어져 있었다고 한다.

아테네에서 180km 떨어진 델포이는 오래전부터 신성시되어 온 곳으로 유명하다.  제우스는 델포이를 세상의 중심으로 선포하고 아들인 아폴론이 머물 곳으로 정했다. 아폴론 신이 사는 곳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델포이는 아폴론 신으로부터 조언을 듣기 위해 델포이로 몰려오게 된다. 아폴론은 신이었기 때문에 신과 인간 사이를 이어주는 여사제를 통해 뜻을 나타내거나 인간의 물음에 답하게 되는데, 이를 신탁이라고 한다. 물론,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 시기 정말 많은 사람들이 신탁을 받기 위해 몰려왔고, 나라의 대소사 또한 이곳에서 결정을 했다고 하는데, 신에게 부탁을 한다고는 하지만, 결국엔 모인 사람들이 의견을 나누고 그들이 결정하는 형태였다고 한다

아폴론 신전 앞에 있는 위 청동 기둥은 세 마리의 뱀이 몸을 휘감고 올라가는 형상을 나타내는 기둥으로 원래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인데, 서기 330년 콘스탄티노스 대제의 명에 따라 터키로 옮겨진다. 이 기둥은 그리스와 페르시아 간에 벌어진 전투에서 31개의 그리스 도시국가들로 구성된 연합군이 페르시아군을 물리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페르시아군인들의 청동방패를 녹여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아폴로 신전에서 내려다본 풍경>

 

<물을 아래로 내려 보내는 홈통>

그리스 시대에는 델포이에서 4년마다 피티아 제전, 축제가 열렸다고 한다. 일종의 음악 경연 대회로 고대 그리스의 4대 축제 중의 하나. 축제가 펼쳐진 이 고대 극장은 BC4세기에 지어진 것인데, 보존 상태가 온전해 지금도 여름철에 음악 연주회나 연극 공연이 펼쳐지는 야외 공연장소로 활용된다.

 

 

 

 

 

 

고대 극장에서 위로 오르는길인데 반듯한 대리석으로 깔려 있다.

 

담장 하나도 빈틈 없이 쌓았는데 마야의 12각 돌을 연상시키는 수준이다.

 

기원전 3세기경에 조성된 트랙 길이 178m, 폭 26m의 경기장이다. 수용 인원이 6,000명이 넘는다. 여름 연극제와 예술 행사가 지금도 열리고 있다.

 

 

 

 

 

내려오는 길에 만난 봉나무와 오디다. 아직은 조금 덜 익었다.

 

위에서 내려다본 아폴로신전이다. 규모가 커서 가까이에서는 한 컷에 담을 수가 없었다. 지금은 6개의 기둥과 축대 부분들만 남아있지만, BC6세기경에 신전이 지어졌을 당시에는 38개의 웅장한 도리아식 기둥이 길이 60m, 폭 23m의 신전을 둘러싸고 있었다고 한다. 

아폴론 신전 내부의 벽이나 기둥에 쓰여있었던 비문 중에 그리스의 유명한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말로 널리 알려진 '너 자신을 알라'있었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 여행작가인 파우사니아스에 따르면, 이 말은 원래 아폴론 신전 앞마당에 새겨져 있던 유명한 격언이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 역시 아폴론 신전에 왔다가 이 문구를 보고 스스로의 무지와 편견을 깨닫는 문답법을 설파했다는 설이 있다.

 

 

 

 

내려오면서 다시 본 아테네인들의 보물 창고인데 삼각 박공 밑에도 여러 경기 모습이 조각되어 있었다.

 

 

 


델포이의 여정을 마치고 메테오라로 가는 길에 그리스의 스위스
'아라호바'에 들렀다. 델피에서 11킬로 떨어져 있어 차로 15분 정도 걸린다. 송송 커플의 '태양의 후예'를 촬영한 곳이라고 해서 예쁜 동네일거라 생각했는데 역시 예상대로였다. 골목길로 접어드니 언니가 옆에서 일방통행로라고 소리친다. 천천히 후진을 하다보니 뒤에 경찰차가 보인다. 민망해서 바라보니 길을 몰라 그러나보다 하고 따라오라면서 앞을 선다. 다라가보니 마을 끝의 주차장에 도착해서 주차를 하고 동네를 돌아보았다. 겨울에 스키 관광으로 유명한 이곳은 아테나 여신에게 미움을 사게 되어 거미가 된 아라크네가 살았다고 하는 전설의 신화가 내려오는 마을이다.  집집마다 골목마다 이야기가 있고 산 위라 그런지 공기도 개끗하고 시원해서 기분이 점점 좋아졌다.

 

 

 

 

 

 

 

 

 

 

 

 

 

 

 

 

 

 

 

 

 

 

종탑이 있는 작은 정교회이다. 내부는 공개하지 않고 있었지만 마당은 들어갈 수 있어 마을 전경을 볼 수 있어 좋았다.

 

 

 

 

 

 

 

 

 

 

 

 

주어진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아 '태양의 후예'에서 송송 커플이 키스를  하던 종탑을 보기만 했다. 아마도 유명세를 톡톡히 치르나보다. 문을 잠궈 놓아 들어가볼 수는 없었다.

 

 

 

 

 

 

 

 

 

 

 

 

 

 

 

 

 

메테오라로 가는 길에 스키장 마을을 지났다. 노란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고 지금은 비수기라 숙소들도 대부분 문을 닫은 상태이나 성수기에는 대단한 관광지일듯 싶었다.

 

 

 

가는 길에 테르모필레 전투터를 들렀다. 아라호바에서 76킬로 1시간 20분이 소요되었다. 페르시아왕 크세르크세스는 유례 없는 물자와 병력들을 데리고 그리스를 침공했지만, 그 수가 너무 많아 그리스군이 충분히 대비할 시간을 주게 된다. 이에 그리스는 스파르타에서 파견한 7000명의 병력과 함께 테르모필레 협곡이라는 굉장히 협소한 골짜기에 진을 치고 기다린다. 100만명의 페르시아와  1만여명의 그리스군. 물론 그 수치가 과장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만큼이나 많은 차이가 나는 병력이 맞붙게 되고 페르시아가 도착한 5일 째 되는 날, 페르시아는 진격을 시작한다. 하지만 페르시아한테는 안타깝게도 그리스 군들은 그 유리한 지형을 사용하여 처음에는 잘 막아내는 듯 보였다. 어차피 그리스 입장에서는 뒤에 이어질 살라미스 해전이 준비가 될 수 있도록 시간만 끄는게 목적이였기 때문에 여유롭게 방어만 하니 그 결과, 페르시아는 번번히 공격을 실패한다. 하지만, 어느 그룹에서나 그렇듯이, 앞잡이는 항상 존재해서 그 지역의 한 그리스인은 페르시아에게 우회로를 알려주고, 페르시아는 그 길을 통해서 그리스 연합의 뒷통수를 치게 된다. 앞 뒤로 공격당하는 그리스 연합군은 나뉘어지고, 300여명의 정예 군사들만이 고립돼 그들은 끝까지 대항하지만, 결국 스파르타 군은 사령관 레오니다스를 포함해서 전멸하고 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테르모필레 전투는 큰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우선, 이 전투는 이후 살라미스 해전을 이기기 위한 전략을 짜는데 시간을 벌고 이들의 군사를 크게 약화 시켰으며, 이 정도 병력차로 이렇게 오랫동안 전투를 이끌었던 점에서 그리스 연합군, 특히 스파르타의 군사력을 알 수 있는 전투였다. 

 

<테르모필레 기념 비>

 

<당시 전투가 벌어졌던 전투터>

 

<내려오며 만난 거대한 라벤더 나무?>

 

 

 

<승리의 여신 니케상>

 

 

 

다시 칼람바카(메테오라)로 향했다. 칼람바카까지 163킬로로 2시간 7분 걸린다. 그리스가 생각보다 넓어서 4일동안 운전만 한 기분이다. 비행기를 타고 가자마자 4일간 장거리 운전을 해야해서 졸음 운전이 걱정되어 평소 잘 먹지도 않는 과자를 세봉지나 가지고 갔다. 무사히 칼람바카에 도착해서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나니 수도원들이 문을 닫을 시간이 가까워져서 그 중 한군데라도 가보기로 했다. 
 캄부니아 산맥으로부터 2개의 바위가 울퉁불퉁한 침식성 바위 및 뾰족바위와 높이·둘레·형상이 가지가지인 바위언덕을 이루며 남쪽의 피니오스 강 골짜기로 솟아 있다. 뾰족바위들은 평균 높이가 300m이지만 550m에 이르는 것도 여러 개가 있다. 일종의 수도원 사회인 은자 부락 중 최초의 것은 두피아니의 기둥으로 불리는 바위 꼭대기에 있던 파나이아 두피아니였다. 이 바위 기둥의 기부에 12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성모 마리아 예배실이 있다. 1350년경 아토스 산의 수도원 공동체에서 온 수도사 아타나시오스 코이노비티스가 플라티 리토스(넓은 바위)에 올라가 여자의 접근을 금하는 규칙을 세운 대(大)메테오론의 최초의 건물들을 지었다. 1367년에 은자 네일로스가 여러 바위 위에 교회 4채를 세웠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아직까지 남아 있다. 1388년에 아타나시오스의 제자인 은자 이오아사프(세르비아의 왕자)가 메테오론을 확장해 가장 부유하고 유명한 수도원으로 만들었다. 투르크족이 테살리아 지방을 점령한 뒤 15~16세기에 수도원이 몇 개 더 세워졌다. 터가 좁은데도 수도원들마다 수사의 개인 기도실, 물 탱크, 1~2개의 교회당, 휴게실이 있었고 도서관이 있는 곳도 있었다. 16세기에 이곳에는 16개의 수도원이 있었는데 모두 밧줄과 그물을 이용해서만 올라갈 수 있었다. 오늘날 이 수도원들은 대부분 빈 집이 되어 있지만 가장 큰 4개의 수도원인 대(大)메테오론 수도원(1356~72), 제성이라고 하는 바를라암 수도원(1530경), 성 스테파누스 수도원(1312), 성 삼위수도원(1458)에는 수도회가 존속해 있다. 이 수도원들은 모두 다리나 바위를 깎아 만든 계단을 통해 갈 수 있다. 수도원들은 제2차 세계대전과 잇따른 내란중에 많이 파손되었다. 메테오라는 1960년 복원되어 필사본들과 16세기 프레스코가 보존될 수 있었지만 1960년대초 도로가 건설되어 관광객이 대규모로 들어갈 수 있게 되자 젊은 수사들은 이곳으로 오기를 기피했고, 기존의 나이 많은 수사들은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인적이 없는 곳을 찾아서 아토스 산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날은 두 개의 수녀원 중 아기오스 스테파노스 수도원에 갔다. 날씨가 별로 좋지 않더니 급기야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우리나라 패키지팀이 보여서 잠깐 가이드의 설명을 함께 들었는데 미리 공부를 해간다 해도 현지 가이드의 설명은 항상 도움이 된다. 순례자의 시설도 갖추어진 넓은 수도원으로 2세기에 소아시아에서 순교한 성 하라람보스에게 바쳐진 교회도 있고 그의 유체도 잠들어있다. 오래된 교회는 1798년에 세워진 것이란다. 수도원의 벽화와 성화는 물론 자료관의 16-17세기 성화와 복사본, 자수 등도 볼거리다. 수녀님들이 잘 관리하고 있어 깨끗했다.

 

 

 

 

 

 

 

 

 

 

 

 

 

 

 

 수도원에서는 긴 치마를 입게 되어 있어 수도원마다 다른 치마를 입는 재미가 있었다. 수녀원을 보고는 드라이브 삼아 다른 수도원들을 보고 사진을 찍었다. 다행히 다음날은 토요일이라 쉬는 수도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