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터키(2014.07.27-08.14)

에페스 유적지를 돌아보며

boriburuuu 2016. 3. 6. 17:23

디딤에서 에페스 유적지까지는 가까웠다. 버스는 1시간30분 만에 일행을 내려주었다. “에페스(Efes)”는 셀축 남쪽에 위치한 “고대 로마의 도시유적”이 있는 곳이었다. 에게해는 물론 터키 전역을 통틀어 규모와 양에서 다른 곳과 비할 수 없는 최고의 유적지였다. 이곳은 기원전 2000년경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으며, 고대로부터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에게해의 중심도시였다. 기원전 11세기에는 이오니아인들에게 점령당한 이후, 기원전 5세기에는 스파르타의 지배를 받았고, 그 후에는 알렉산더 대왕과 로마의 지배를 받았다. 한 때 25만 명에 달하는 번영을 누렸던 에페스는 7세기경 강에서 내려온 토사가 바다를 메워 항구도시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고 한다.  바다와 연결되었던 북쪽에서부터 남쪽을 향해 걸어오면서 보아야 옛날 배에서 내린 상인들의 정취를 느낄 수 있었으나, 일행은 남문주차장에 내렸다. 유적지 방문이 끝나면 북문주차장에서 버스를 타게 되므로, 어쩔 수없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언덕을 내려가며 보게 되었다. 유적지에 입장하자, 바리우스욕장(Varius Bath)이 나타났다. 2세기에 건립된 목욕장으로 내부에 탈의실, 냉탕, 온탕, 사우나, 공중화장실 등이 있었다. 이 욕장은 하이퍼코스트(Hyppcaust)라는 난방시스템을 갖추어 바닥 아래로 온기가 통하도록 되어 있었다고 한다. 목욕탕부터 시청사까지 뻗어있는 약165m의 길인 바실리카가 있었다. 아래는 다리우스 욕장이다.

 

 

 

 

 

왼쪽 앞에는 넓은 터가 보였는데, 위층 아고라(Upper Agora)였다. 원형극장 부근에 있는 상업아고라와는 달리 정치적 회의를 하던 곳이었다. 길이160m, 폭73m에 달하는 넓은 면적에 3면이 열주로 되어 있고, 중앙에는 1세기에 건립된 이시스신전(풍요를 관장하는 이집트 여신)이 있었다고 한다.

 

바실리카 오른쪽에는 약1,400명을 수용하는 지붕이 있었다는 소극장 오데온(Odeon)이 있었다. 이곳에서는 음악회나 시낭송회가 개최되었으며 정치적 의사결정이 이루어지기도 했단다. 그 옆에는 프리타네이온(Prytaneion, 신전 및 시청사)이 있었다. 기원전 3세기에 처음 지어졌으며, 제의가 거행되고 공식행사와 연회가 개최되던 도시행정의 중심 건물이란다. 여기에서 1956년 발굴 중 두 개의 아르테미스 여신상이 발견되어 셀축의 에페스고고학박물관에 전시되었다고 한다.

 

 

 

<에페스 유적지의 프리타네이온(신전 및 시청사) 모습>

 조금 내려가자 가로 20m, 세로 100m 규모의 도미티아누스신전(Temple of Domitianus)이 있었다. 지금은 거의 무너지고 앞에 출입문 기둥 두 개가 외롭게 신전을 지키고 있었다. 옆에는 1세기 아우구스투스황제 때, 멤미우스가 세운 맴미우스 기념탑(Memmius Mounment)이 있었다.

 

 

 

 

<에페스 유적지의 멤미우스 기념탑>

  조금 아래에는 니케(Nike)여신 부조가 있었다. 날개가 있었으며 오른 손에는 밀 다발을 들고, 왼손에는 승리의 상징인 월계관이 들려 있었다. 니케여신 건너편에는 기원후 97년 폴리우스가 건립한 폴리오 샘(Pollio Fauntain)이 있었다. 물의 궁전과 함께 에페스로 공급하는 물을 관리하던 곳이었다.

 

 

 

 

그 위에는 물의 궁전(Water Castle)이 있었다. 기원후 80년에 지어진 건물로, 폴리오 샘과 더불어 도시로 물을 공급하던 곳이었다. 궁전이라는 말에서 건물의 중요성을 유추해 볼 수 있었으며, 내부에는 비너스가 조각된 분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 옆에는 물을 공급하는 돌을 이어서 만든 수도관이 있었다.

 

<에페스 유적지의 물의 궁전 모습>

 

 

<에페스 유적지의 물의 궁전 옆에 있는 돌로 만든 수도관 모습>

니케여신 부조를 지나 아래로 내려가니 쿠사데스거리가 나타났다. 거리에서 제일 먼저 나타난 것은 헤라클레스 문(Gate of Heracules)이었다. 헤라클레스가 자신의 상징인 사자 가죽을 어깨에 두르고 있었다. 다른 문과 달리 폭이 좁은데, 이것은 수레의 통행을 제한하기 위한 것이었다.

 

<에페스 유적지의 니케여신 부조에서부터 시작되는 쿠사데스거리>

 

 

<에페스 유적지의 쿠사데스거리에 있는 조각>

 

 

<에페스 유적지 쿠사데스거리에 있는 헤라클레스 문 모습> 이어서 나타난 것은 2세기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에게 바친 트라아누스 샘(Fauntain of Trajanus)이었다. 이곳에 황제의 석상이 있었고 발끝에서 물이 흘렀다고 한다. 앞에는 고관들과 세력가들이 살았던 곳인 고급주택 터(Tarraced Houses)가 있었다. 이곳은 별도의 요금을 받았으나, 시간이 없을 뿐 만 아니라 공사하는 곳이 있어 들리지 않았다.

 

<에페스 유적지의 트라아누스 샘 모습>

 

 

<에페스 유적지의 고급주택 터의 일부 모습>

 

 조금 내려오자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코린트식 기둥과 아치가 멋있는 히드리아누스신전(Temple of Hadrianus)이 있었다. 정면 아치 위에는 행운의 여신 티케가, 안쪽 아치 위에는 악귀를 쫓아준다는 메두사가 조각되어 있었다.

 

 

 

<에페스 유적지의 공사 중인 히드리아누스신전 모습>

 

 뒤에는 2세기 지었다는 3층으로 된 거대한 목욕장인 스콜라스티카욕장(Scholastika's Bath)이 있었다. 부유한 여인 수백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중앙난방과 냉온탕 시설과 함께 개인탕도 있어 원하면 며칠 동안 묵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그 흔적만 보일 뿐이었다.

 

 

 

<에페스 유적지의 스콜라스티카욕장 모습>

 

 

<스콜라스티카욕장의 온탕 터 모습>

 다음은 50명이 동시에 사용할 수 있었다는 공중화장실(Latine)을 찾았다. 벽을 따라 둥근 구멍이 좌변기였으며, 앞에 수로가 있어 볼일을 마친 후 씻을 수 있었다. 물이 흘러들어오는 위쪽은 이용료가 비쌌고, 냄새가 나는 아래쪽은 저렴했다고 한다.

 

 

 

<에페스 유적지의 공중화장실 모습>

 

 하드레인 문(Hadrian's Gate)을 지나자, 쿠사데스거리와 대리석거리가 만나는 모서리에 유곽(House of love)이 있었다. 매춘업소로 1세기에 지어졌으며, 1층은 거대한 홀이고 2층은 작은 방들이 빼곡하게 줄지어 있었다고 한다. 유곽에서 조금 떨어진 대리석거리에는 남자의 왼쪽 발자국을 새겨놓아 발을 재서 그보다 작은 사람은 유곽출입을 금지시켰다고 한다.

 

 

 

<에페스 유적지의 하드레인 문 모습>

 

 

<에페스 유적지의 유곽 모습>

 

 

<에페스 유적지 대리석거리 인도에 있는 남자의 왼쪽 발자국>

 

 유곽 앞에 에페스의 상징으로 2세기 초반에 건립한 켈수스도서관(Library of Calsus)이 있었다. 전성기에는 12,000권의 두루마리 장서를 보관했는데, 알렉산드리아, 페르가몬에 이어 고대 지중해에서 세 번째로 큰 규모였다. 정면에는 네 명의 여인석상이 있는데, 각각 지혜(Sophia), 덕성(Arte), 지능(Ennoia), 지식(Episteme)을 상징한다고 했다.

 

 

 

<에페스 유적지의 상징인 켈수스도서관 모습>

 

 도서관에서 아고라로 나가는 문은 3개의 아치로 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마제우스와 미트리다테스의 문(Gate of Mazeus and Mitridates)이었다. 이들은 노예였다가 자유의 몸이 되면서 아우구스투스황제와 그의 가족을 위해 바친 것이었다. 문 옆 건물에는 조그마한 아르테미스 신상이 있었다.

 

 

 

<에페스 유적지의 마제우스와 미트리다테스 문 모습>

 

 

<마제우스와 미트리다테스 문 옆에 있는 아르테미스 신상>

 

 문을 나서자, 에페스 중앙시장인 넓은 상업아고라가 나타났다. 기원전 3세기인 헬레니즘시대부터 있었던 것을 3세기 초 카라칼라황제가 대대적으로 증축했다. 항구와 가까운 곳에 있어서 유럽과 지중해 각지에서 들어온 물건들이 총집합했고, 노예들도 거래된 거대한 국제시장이었다고 한다.

 

 

<에페스 유적지의 상업아고라 모습>

 

 

<에페스 유적지의 상업아고라 옆 상점가 모습>

 

 

<에페스 유적지의 상업아고라와 상점가를 지나서 있는 유적 잔해물들>

 

  대리석거리 끝에는 헬레니즘시대(기원전 3세기)에 처음 지었으나, 로마시대(1세기)에 증축한 대극장(Great Theatre)이 있었다. 산의 경사면을 이용해 지은 것으로 지름 154m, 높이 38m의 반원형 구조에 수용인원 24,000명을 자랑하는 거대한 규모라고 했다. 여기는 시각과 음향효과를 고려해서 무대에서 멀어질수록 급경사인 것이 인상적이었다.

 

 

 

<에페스 유적지의 원형극장 내부 모습>

 

 

 

<에페스 유적지의 원형극장 전경>

 

 일행은 원형극장부터 항구까지 폭11m, 길이 500m이며, 원기둥이 길게 늘어선 아르카디안거리(Arcadian Street)를 바라보았다. 상점들이 즐비했던 이 거리에 50여개의 횃불로 가로를 밝히기도 했는데, 당시 가로등시설이 있었던 곳은 로마, 안티오키아, 에페스 뿐이라고 한다.

 

 

<에페스 유적지의 아르카디안거리 모습>

 

 

 

 일행은 물 저장고를 돌아보고 성모 마리아교회(Virgin Mary's Church)로 발길을 옮겼다. 아르카디안거리를 걸어오다 숲으로 들어왔는데, 오는 길옆에는 석관들이 여러 개 놓여 있어 이곳이 공동묘지란 생각이 들었다.

 

 

<에페스 유적지의 물 저장고 모습>

 

 

 

<에페스 유적지의 아르카디안거리에서 성모마리아교회로 가는 길의 석관들>

 

 이곳은 431년 성모 마리아가 예수의 어머니인가. 하나님의 어미인가에 대한 논쟁으로 유명한 종교회의가 열렸던 곳이다. 이 회의에서 예수는 신성과 인성을 모두 인정받아 성모 마리아는 신의 어머니임을 확인했다고 한다.

 

 

 

<에페스 유적지의 성모 마리아교회 앞부분 모습>

 

 

<에페스 유적지의 성모 마리아교회 뒷부분 모습>

 

 

<에페스 유적지 성모 마리아교회에서 추억을 남기고>

 

 에페스 유적은 한 골짜기를 몽땅 차지한 엄청난 규모였다. 유적을 돌아보았을 때, 에페스는 헬레니즘시대부터 발전하기 시작한 도시였으나, 로마시대에 증축하거나 새로운 시설을 만들어 현재의 유적이 남아있는 것 같았다. 교회 옆에는 항구목욕장이 있었다고 하는데, 일행은 바로 북문으로 나가 잠시 휴식을 취하고, 버스를 탔다(11: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