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미술관/루브르박물관

루브르의 외젠 들라크루아

boriburuuu 2019. 7. 2. 23:27

 

웨젠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다. 1831년

1881년  화가의 대표작인 이 작품은 1830년 프랑스의 7월 혁명을 기념하여 그려졌다. 7월 27일 샤를 10세에 대항한 폭동이 일어났는데 언론 검열이 도입되자 폭동이 일어났고 이 그림은 파리 시민들이 자유를 위해 싸워 승리를 거둔 투쟁을 기념하고 있다. 자유의 의인화는 가슴을 드러낸 여신의 형태로 그렸고 위험 속에서도 국기를 들고 투사들을 이끌고 있으며 공화주의자와 군주제의 화해를 상징한다. 오른쪽 학생복을 입은 남자는 <레미제라블>에 등장하는 파리의 부랑아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모자를 쓰고 총을 들고 있는 남자는 화가 자신으로 보인다. 프랑스의 자유와 혁명을 상징하는 그림이다. 

들라크루아의 <푸아티에 전투 (1356년 9월 19일) >다. 1830년

들라크루아의 <피에타>다. 1837년경

로소 피오렌티노의 의 작품에 대한 오마주로 1843년 파리의 생드니뒤생사크라망 성당을 위해 그린 그림이다.

들라크루아의 <춤추는 두 명의 그리스 병사 (습작) >이다. 1824년

들라크루아의 <모로코의 유대인 결혼식>이다. 1839년

들라크루아의 <수리오트 복장 습작 두 개>이다. 1824년

 

들라크루아의 <로미오과 줄리엣>이다.

 

들라크루아의 <자화상>이다. 1837년

들라크루아의 <리에주 주교의 암살 (아르덴의 멧돼지라는 별명을 가진 기욤 드 라 마르크) >이다. 1829년

 

들라크루아의 <프레데리크 쇼팽의 초상. 원래는 쇼팽과 조르주 상드를 그린 더 큰 그림의 일부분임 >이다. 1838년

 

들라크루아의 <디에프 언덕에서 바라본 바다>다. 1852년

 

들라크루아의 <모르네이 백작의 가옥>이다. 1833년

 

들라크루아의 <묘지에 있는 햄릿과 호라티오>이다. 1839년

들라크루아의 <바이런 시편에 나오는 시옹성의 죄수 >이다. 1834년

들라크루아의 <정물 ( 바닷가재가 있는 정물)>이다. 1826년

들라크루아의 <묘지의 고아>다. 1824년

들라크우라의 <긴 소파에 누운 나부의 습작>이다. 1825년

외젠 들라크루아의 <키오스의 대학살: 죽음을 기다리는 그리스인 가족들 혹은 노예>이다. 1824년

 

외젠 들라크루아의 <알제리의 여인들>이다. 1834년. 이 작품에 대해 르노와르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작품'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느낌이 르노와르와 비슷하기도 하다. 1832년 프랑스 정부 대표단으로 알제리에 갔던 화가가 실제로 하렘을 갔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하렘의 관능적인 분위기로 보는 이를 유혹한다. 왼쪽과 중앙의 여인은 동일인으로 무니 벤술탄이고 자매인 제라 벤술탄과 대화를 하고 있다. 부자연스럽게 그려진 그림인데도 색의 예리한 대조와 빛과 그늘을 사용해 하렘의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잘 나타낸다. 이 그림은 예술적으로나 테크닉적으로 훌륭한 솜씨를 자랑하며 다른 화가들에게도 많은 영감을 주었다.

외젠 들라크루아의 <사르다나팔로스의 죽음>이다. 1827년. 화가의 작품중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 작품으로 아시리아 니네베의 왕이었던 사르다나팔로스가 기원전 7세기 죽기 전날에 있었던 대학살을 그린 것이다. 왕은 사랑하는 것들이 적의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대학살을 명했다. 뒤얽힌 몸들, 말, 옷, 가득 쌓인 보물 등 혼란스러워 보인다. 대학살에도 피 한방울 보이지 않지만 그림 곳곳의 붉은 색이 웅장한 강처럼 침대로부터 흘러 대학살을 예고한다. 루벤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낭만즈의 시대의 아름다운 그림이다.

외젠 들라크루아의 <두 마리 호랑이 습작>이다. 183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