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시아/중국 시안

한양릉 지하박물관, 남궐문, 한경제 양릉,황후묘

boriburuuu 2019. 11. 11. 00:01


중국식 장미화원이 양쪽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지금은 가을이라 좀 휑하다.

한양릉은 서한의 6번째 황제인 한경제 유게의 능묘다. 한문제 유항과 효문완후 두씨의 다섯째 아들이랑다. 한경제는 재위기간 16년 동안 지방관들의 토지를 삭감하는 삭번책을 시행하고 칠국의 난을 진압하여 중앙집권을 공고히 했을 뿐 아니라 아버지 한문제의 유지를 받들어 근검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세금을 경감시켰는데 이를 '문경의치'라고 한다. 이후 아들 한무제 유철의 한무성세 시대의 중요한 기초를 다져주었다. 기원전 141년 48세로 미양궁에서 병사했다. 한양릉은 한경제 유계와 황후 왕씨의 능묘인데 양릉, 제릉, 후를, 암북 종장갱, 형도목지, 능묘, 배장묘원,양릉읍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지하박물관이다. 대량의 도용이 발견된 지하 갱도에 세워져 바닥에 통유리를 깔아 지하 갱의 원형을 생생하게 체험하도록 설계했는데 통유리 밑으로 도용들이 서 있다. 여성, 남성, 환관, 등 인간의 테라코타와 돼지, , , 말 등의 가축 테라코타도 즐비한데 생김새가 비슷하고 표정이 밝아 친근하다. 원래는 옷을 입고 다양한 표현을 하고 있었는데 썩어서 지금은 나체 상태이다. 해서 남녀가 확실히 구분되며 특히 환관은 성기가 잘린 흔적까지 묘사했다. 팔을 나무로 제작해 몸체에 부착했다. 다리를 벌리고 춤추는 듯한 자세의 테라코타는 기마병이다. 순장의 변천사를 보여주는데 주대에는 산사람과 동물을 그대로 묻었고 진대에는 실물 크기의 토용을 묻었으며 한 대에는 축소하여 묻었음을 알 수 있다 




한양릉에서는 두 팔이 없는 나체의 남녀 도용들이 많은데 채색된 수 많은 도용들은 땅에 묻힐 때 옷을 입고 목제 팔을 달고 있었는데 출토 당시에는 옷과 나무 팔은 부식되어 없어져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한양릉에서는 진흙으로 만든 많은 동물들도 출토되었는데 수염이 길고 온순한 표정을 한 염소와 귀를 세우고 사나운 눈매를 하고 긴 꼬리를 내린 이리, 도톰한 입과 귀를 가진 새끼 돼지를 비롯한 가축들이 발굴되어 지하 동물세게를 방불케할 정도라고 한다.




지하 박묵관을 나오니 그당시의 복장과 유물을 전시한 공간이 있었다. 도용들은 이런 옷을 입고 잇었을 것이다. 세월의 무게에 다 썩어 나체인채로 발견되었지만.



서한 황릉의 제사

서한 황릉의 생활 용구

도용 제작



서한의 도기




이런 틀로 만들었나보다.




아쉬움에 다시 한번 들어가서 둘러 보았는데 이게 치명적인 실수 였음을 밖에 나가서 깨닫게 되었다. 버스가 하루에 네번밖에 다니지 않아 1시간 반을 기다렸었다.



















외장갱들이다. 번호가 매겨져 있는데 방금 본 지하박물관은 11-20호 구역 지하에 만든 것이다.


한경제릉이라는비석이 서 있다. 한 경제 양릉이다. 봉분의 윗부분이 밋밋한 피라밋형이다. 가로 세로 각 170미터에 높이는 20미터다.

한양릉 남궐문이다. 양릉은 4각형의 성곽 모양으로 둘러싸여 있고 사방에 궐문이 있었다고 한다. 남궐문을 무너진 궐문 자체를 관람객이 볼 수 있도록 진열실 형태로 복원하고 있었다. 궐문루를 복원하고 건물 내부에 무너진 궐문터를 그대로 전시하고 있는 것이다.


빨간색 철제 기둥을 받쳐서 전시실을 만들었다. 주위에 관람로와 게단을 만들어 올라가서 볼수도 있었다.


전시된 주궐대로 매우 웅장하고 그 규모가 크다.










다시 버스를 타기 위해 양을으로 간다.

중국인 해설사가 열심히 설명을 하고 있다. 알아듣지 못하지만 예전에 황제들이 여기와서 참배도 제사도 드리면서 기념 비석을 세웠는데 지금 남아 있는 것은 5개 뿐이라는 말인것 같았다.




버스 시간이 남아 황후의 능을 찾아 나섰는데 반쯤 허물어진 능을 보고 깜짝 놀랐다.

다행스럽게도 황후의 능은 저멀리 있었다. 역시 작은 언덕 같이 보인다. 길도 제대로 없고 해서 가보는것은 생략한다.


이것도 누군가의 능이었을텐데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