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미술관/오르세 미술관

오르세 바르비종파 화가들 위주

boriburuuu 2020. 12. 26. 16:24

장 프랑수와 밀레의 <만종>이다.  1857-59년.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안젤루스를 암송하며, 수녀회 중에 마리아에게 천사의 인사를 전하는 기도를 한다. 그들은 감자 수확을 중단하고 모든 도구, 포크, 바구니, 가방과 수레가 그려져 있다. 1865년, 밀레는 "안젤루스는 내가 어떻게 들판에서 일하셨는지, 할머니가 실패하지 않고 종소리를 듣고, 이 가난한 죽은 자를 위한 천사들을 위한 안젤루스를 말하는 일을 그만두게 하는 방법을 생각한 그림"이라고 회상한다. 따라서 그림의 기원은 어린 시절의 기억이며 종교적 느낌을 높이려는 욕망이 아니라 밀레는 연습하지 않았다. 간단한 장면에서, 그는 농민의 불변의 리듬을 설정하고 싶어. 여기서 화가의 관심은 휴식의 시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장 프랑수와 밀레의 <실 잣는 여인, 오베르의 염소지기>다. 1868-69년. 제방에 앉아 있는 어린 농부 소녀가 양털을 스핀들로 돌리며 염소를 보고 있다. 그녀는 거친 양털로 만든 드레스를 입고 발에 나무 발굽을 가지고 있으며 모양이 없는 가장자리가 있는 짚 머리 모자를 착용했다. 이 어린 스피너는 1866년 오베르뉴와 앨리어에 머무는 동안 밀레가 만든 일련의 스케치에서 바비슨에 그려졌다. 여기에 이 농민 여성은 관람자를 향해 똑바로 보고 그를 자신의 심리적 우주에 입력한다.

장 프랑수와 밀레의 <이삭줍기>다.  1857년.

장 프랑수와 밀레의 <키질하는 사람>이다. 1848년.

장 프랑수와 밀레의 <건초 말리는 사람들의 휴식>이다. 1848년.

장 프랑수와 밀레의 <양 떼 목장, 밝은 달빛>이다. 1872-73년.  

장 프랑수와 밀레의 <뜨게질하는 여인>이다. 19세기.

장 프랑수와 밀레의 <양치는 소녀>다. 1850-55년.

장 프랑수와 밀레의 <봄>이다. 1868-1873년.

장 프랑수와 밀레의 <소 떼들의 귀가>다. 19세기경.  성가족처럼 보인다.

장 프랑수와 밀레의 <양떼를 지키는 여인>이다. 1863년. 양모 케이프라인을 입고 빨간 후드를 입은 어린 목자(아마도 화가의 딸)가 양 떼 앞에 서 있다. 그녀는 뜨개질을 하고 서 있다. 단조로운 풍경에서, 그녀는 양떼를 혼자 돌보고 있다. 무리는 기복이 심한 빛의 자리, 석양의 불꽃을 반사하는 것처럼 형성된다. 이 장면은 정확성과 우울함으로 감탄할 만하다. 1862년 초, 밀레는 양들을 지키는 목자 그림을 떠올렸다.

장 프랑수와 밀레의 <그레빌의 노르망디 우유 장수>다. 1874년.

콩스탕 트루아용의 <아침의 일하러 가는 황소들>이다. 1855년.  동물 그림을 주로 그린 화가인데 소 그림은 특히 탁월하다.

샤를 자크의 <농장의 양떼>다 19세기.

콩스탕 트루아용의 <거위 지키는 사람이 있는 방목장>이다. 1854년.

 

줄스 브레튼의 <이삭줍기에 온 여인들>이다. 1859년.  이 그림은 밀레의 이삭줍기와 거의 같은 시기에 그려졌다. 그림속의 여인들은 브르타뉴의 아름다운 자연 속에 씩씩하고 건강한 모습이다.

위리암 모리스 헌터의 <시골 처녀, 데이지 꽃>이다. 19세기. 헌트는 목동이나 건초밭의 농부들 같은 시골의 인물들과 일상적 풍경을 주제로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다. 매우 단순한 구성의 이 그림의 주인공은 짙은 갈색 머리를 동여 맨 아름답고 젊은 시골처녀이다. 작품의 제목이자 그녀의 손에 들린 ‘데이지 꽃’은 ‘순진함, 미인’이라는 꽃말처럼, 동화 같은 사랑을 꿈꾸는 순수한 여성을 상징한다. 황금빛 밀밭에 서 있는 인물은 오른쪽으로 살짝 몸을 돌리고 있는데, 하얀 블라우스가 어깨 위로 흘러내리면서 자연스레 등을 노출하고 있다.

장 밥티스트 까미유 코로의 <요정들의 춤>이다. 1860-65년. 작품 속 요정들은 (실제는 사람처럼 표현되어 있지만) 단순히 그 장소를 좀 더 이상적인 분위기로 만들어주는 요소일 뿐이다. 코로는 오히려 실제 풍경을 면밀하게 관찰하여 묘사했으며, 부드러운 은회색 색조를 전반에 가미하여 은은하게 표현했다. 이처럼 코로는 단순하게만 보일 수 있는 풍경을 자신만의 붓 터치를 통해 시와 음악이 흐르는 듯한 우아하고 아름다운 풍경으로 바꾸었다. 실제로 이 작품과 <아침, 요정들의 춤>은 풍경과 인물이 서로 좌우 대칭으로 표현되어 있어 흥미롭다.

까미유 코로의 <사랑의 신과 놀고 있는 남프>다.

마리 로잘리 보뇌르의 <네베르네에서의 경작>이다.  1849년.

나르시스 디아즈 드 라 페나의<숲의 가장자리>다. 1871년.

에르네스트 앙투완 오귀스트 에베르의 <말라리아>다. 19세기경.

쥘 뒤프레의 <참나무들이 있는 웅덩이>다. 19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