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미술관/프라도미술관 34

고야 문제작 위주

고야의 〈옷을 벗은 마야〉다. 1796-1798년. 녹색의 긴 소파 겸 침대 위에 풍성한 비단 쿠션과 비단 시트를 깔고 한 여인이 길게 누워 있다. 두 팔을 머리 뒤로 하고 누워 있는 그녀는 관람자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다. 어떤 은밀함도 담겨있지 않으며 어떤 부분도 숨김없이 보여주며 시선을 맞받아치고 있다. 이전의 그림들과는 달리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아름다움이 있다. 은은하게 감도는 빛을 받아 빛나는 인체, 신체 사이로 숨겨진 명암, 순백의 피부와 그 아래 접힌 천의 질감이 심장의 고동소리와 호흡까지 느껴질만큼 생생하게 표현되었다. 어떤 설명이나 구성에도 신경쓰지 않고 모델에게서 나오는 느낌에만 집중한 이 그림은 마네 등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고야의 다. 1796-1798년경. 위의 그림과 같은 ..

고야 의 초상화들

고야의 이다. 남동생이 친촌 백작 작위를 받았으나 성직자의 길을 선택하면서 작위를 누나에게 넘겨주었다. 당시 왕인 카를로스 4세와는 사촌 간으로, 왕의 최측근인 마누엘 고도이와 결혼했다. 마누엘 고도이는 왕비의 애인이었고, 물론 그에게는 왕비 외의 다른 애인도 있었다. 고야가 이 여인을 그린 것은 이 작품이 처음은 아닌데, 백작부인의 아버지이자 카를로스 3세의 동생인 인판테 돈 루이스 가족의 그룹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고, 3살 때의 백작부인을 단독 초상화로 그린 적도 있었다. 이 초상화를 그릴 때 스무 살이었던 백작부인은 임신 중이었고,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초상화 모델로 앉아 있을 때 남편인 마누엘 고도이가 언제 오는지 하도 기다리는 통에 약간만 인기척이 나도 뒤를 자꾸 돌아봤다고 한다. 이런 상태..

고야 풍속화 위주

고야가 소시민들의 모습을 담은 것은 〈양산〉처럼 성 밖 출입이 자유롭지 못한 왕실 여자들에게 스페인 사람들의 낙천적인 일상을 보여주기 위함도 있었지만, 신화나 종교적 주제를 다루는 ‘역사화’에 대한 왕실의 선호가 주춤하기 시작한 것과도 관련이 있다. 18세기가 무르익으면서 프랑스를 위시한 서구 미술계는 딱딱하고 고루한 역사화보다는 귀족들의 향락적인 문화를 담는 아기자기하고 세속적인 로코코 미술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스페인 왕가 역시 프랑스 왕가 부르봉의 혈통으로 이어지면서 소위 ‘프랑스적인 것’에 대한 애정이 두드러졌고, 로코코 역시 그런 연유에서 자연스레 흡수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이 퇴폐적이기까지 한 귀족 놀음들에 대한 계몽주의의 비판이 거세지자 스페인 지식인들 역시 각성하기 시작했다. 〈부상당한..

루벤스 2

(대)얀 브뤼헐은 루벤스의 공방에서 작업하면서 서로 친분을 쌓아갔다. 프라도 미술관에는 그가 인간의 오감, 즉 시각, 청각, 미각, 후각, 촉각 등을 주제로 하여 루벤스와 공동 작업한 그림들의 일부가 걸려 있다. 이 그림들 속에 빼곡한 갖가지 사물들은 정물화의 거장인 (대)얀 브뤼헐이 그렸고, 인체 묘사 등은 루벤스가 맡았다. 오감과 관련한 그림들은 농업의 발달과 각종 무역으로 인해 풍요로워진 물질세계에 대한 일종의 예찬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많은 것들을 탐하는 기쁨은 에로틱한 쾌감에 가까웠기에, 이들 감각을 의인화한 여인은 주로 누드나 반쯤 벗은 몸으로 그려져 있다. 얀 브뤼헐과 루벤스가 공동 작업한

피터 폴 루벤스 1

루벤스의 이다. 1639년. 새로 지은 부엔레티로 궁을 장식하기 위해 펠리페 4세는 플랑드르와 이탈리아 등으로부터 다량의 작품을 주문하였다. 루벤스의 경우는 거의 100여 점이 넘는 작품을 제작하기로 계약되었는데, 〈파리스의 심판〉도 그중 하나다. 그림은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자신 앞에서 한껏 미모를 과시하는 세 여신을 심사하는 장면이다. 올림포스 신들의 연회에 정식으로 초대받지 못한 불화의 여신은 “가장 아름다운 이에게”라는 글자가 새겨진 사과를 신들의 식탁에 던졌다. 하지만 누구를 뽑아도 뒤끝이 좋지 않을 것을 염려한 신들은 그 사과를 인간 세상으로 던져버렸다. 신들의 분란이 인간 세계의 분란으로 이어진 것을 그림 속 파리스는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다. 그의 뒤에는 뱀이 꼬여 있는 지팡이를 늘 ..

정물화

멜렌데스는 자신이 그린 그림 몇 점을 훗날 카를로스 4세로 왕위에 등극하는 왕세자 부부에게 보내 인정받으면서 그림 주문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왕세자 부부가 멜렌데스의 그림을 걸어두려고 했던 곳이 하필이면 왕립아카데미 건물 2층이어서 결국 전시되지 못하고 있다가, 훗날 아란후에스 궁정으로 옮겨져 소장되었다. 이는 당시 스페인 사회가 심지어 미술계마저도 실력보다 인맥과 처세술에 좌지우지되는 상황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루이스 멜렌데스의 다. 1772년. 루이스 멜렌데스의 이다. 루이스 멜렌데스의 다. 1770년. 검은 배경, 명료한 선 그리고 사진을 방불케 하는 사실적인 묘사는 산체스 코탄이나 수르바란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그의 그림 속 대상들의 표면 처리가 너무나도 뛰어나 눈으로 보는 그림이 아니라 거..

모랄레스, 베로네제,귀도 레니,바로치

루이스 드 모랄레스의 다. 1568년. 모랄레스는 종교화를 주로 그렸는데 성스러운 인물들의 반신상을 주로 그렸다. 중간 톤의 색상을 유지하면서 애틋하고 감성적인 분위기를 강조했다. 그기 표현한 인물들의 얼굴에서 나타나는 부드러운 음영 처리는 레오나르도식 표현 방법이다. 의상의 주름을 디테일하게 섬세히 표현했고 길쭉하게 늘린 모습과 차가운 색감은 메너리즘 화가라는 것을 보여준다. 어두은 배경을 뒤로한 아기 예수와 마리아의 모습은 부드럽고 사랑이 가득하며 자비로움 그 자체다. 곱슬거리는 아기 예수의 머리카락과 엄마의 가슴을 만지는 아기의 모습에서 신성보다는 인간적인 따뜻함이 전해진다. 파올로 베로네제의 다. 1580년. 베로네제는 생의 마지막 10년 동안 화려하고 장식적인 방법으로 종교화를 그렸는데 그 중 ..

벨라스케스 3

벨라스케스의 다. 1632년. 벨라스케스의 이다. 1630년. 벨라스케스의 다. 1626-36년 벨라스케스의 이다. 1628년. 필리페 4세는 필리페3세와 오스트리아의 마르게리타 사이에서 태어난 인물로 1621년 16세에 왕위에 올랐다. 벨라스케스는 여러 형태로 그의 초상화를 그렸다. 이 작품에서는 청년기의 젊고 화사한 모습으로 금발과 귀족적인 아름다움이 돋보인다. 확실하게 구분되어 있는 갑옷의 부분이 명확하게 보인다. 긴 붓터치가 젊은 왕이 입고 있는 고급스럽고 훌륭한 갑옷의 광채를 두드러지게 보이게 한다. 벨라스케스의 이다. 1644년. 종교화를 많이 그리지 않은 벨라스케스가 마드리드의 알카사르에 있는 이사벨라 여왕의 작은 에배실을 위해 그린 그림으로 마리아의..

벨라스케스 2

벨라스케스의 다. 벨라스케스의 다. 1657년경. 리디아에서 염색업을 하던 아라크네라는 처녀가 있었다. 아라크네는 베 짜는 솜씨가 하늘을 찌르자 스스로 그 바닥 최고의 신인 미네르바(아테나)보다 자신의 실력이 더 낫다고 자랑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미네르바는 노파로 변신해 아라크네와 실력을 겨루게 되었다. 아라크네의 불행은 그녀가 이 노파보다 진짜로 더 실력이 뛰어났다는 데서 시작된다. 분노한 미네르바가 아라크네를 거미로 변신시켜 평생 실과 함께 살도록 저주를 내려버린 것이다. 그림은 공간 깊숙한 안쪽의 후경과 전경의 두 부분으로 나뉜다. 벨라스케스는 두 부분의 관계에 대해 그 어떤 명확한 해석도 제시하지 않지만, 대체로 전경은 경합을 벌이는 장면이며, 후경은 이 시합의 결말 부분으로 본다. 후경 안쪽 아..

벨라스케스 광대와 난쟁이

벨라스케스의 이다. 왕실 사냥터에 세워진 별장 토레다데라파라다의 벽면을 장식하기 위해 그린 작품이다. 우리에게 《이솝 우화》로 유명한 이솝은 기원전 6세기 인물로, 소크라테스와 같은 시대를 살았다. 따라서 이 그림은 실제 모델을 두고 그린 것이라기보다는 벨라스케스가 그에 대한 지식과 관념으로 만들어낸 상상적 인물형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벨라스케스의 이솝은 이탈리아의 화가 조반니 바티스타 델라 포르타가 쓴 인상학 서적의 ‘황소머리 유형’을 참고했다. 이솝은 학식과 재능에서는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혀를 내두르게 할 정도였지만, 노예로 태어나 델포이 신전에 도둑질을 하러 들어갔다는 누명을 쓰고 절벽에 떠밀려 죽은 비운의 인물이다. 소크라테스도 추남 중의 추남이었다고 하나 이솝은 그보다 더 흉했고, 심지어 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