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미술관/루브르박물관

루브르의 영국, 스페인 화가

boriburuuu 2020. 8. 6. 23:37

 

조슈아 레이놀드경의 <헤어 도련님>이다. 런던 왕립 미술 아카데미의 초대 회장이자 왕에게 작위까지 받은 18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영국 미술가인 죠슈아는 밝은 분위기와 생동감있는 인물묘사로 유명한 어린이 초상화가였다. 이 그림은 1789년 시력을 완전히 잃고 작업을 중단한 화가가 최후에 완성한 작품 중 하나다. 모델은 프렌시스 조지 헤어로 숙모의 양아들이었는데 그녀를 위해 그림을 그렸는데 두살난 아이는 여자옷을 입고 있고 긴 머리카락 때문에 여자아이로 보이며 자연스러움과 천진난만함을 발산하고 있다. 공원에서 놀고 있는 소년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보이며 어린이 초상화 역사상 가장 유명한 그림이다.

토마스 로렌스경의 <애스코헤 부세레트의 아이들>이다. 1800년

토마스 로렌스경의 <아이작 커스버트 부인>이다. 1817년.


윌리엄 터너의 < 강과 그 뒤 만의 풍경>이다.

프란시스코 데 고야의 <페르디낭 기유마르데의 초상>이다. 1798년.

고야응 궁정화가이면서 소박한 서민층의 고통에 공감하는 화가였다. 로코코양식의 품위 있는 사회를 그린 초기의 초상화들은 나중에는 꾸미지 않은 현실을 묘사하는 작품으로 변해갔다. 그의 초상화들은 외양을 그리는데 그치지 않고 모델의 성격을 들여다보는 통찰을 제공한다. 모델은 에스파냐의 프랑스 대사를 지냈던 페르디낭으로 삼색현장과 탁자 위의 삼색 깃털 장식으로 알 수 있다. 군인같은 자세지만 몸을 비트는 자세는 임무에 대한 불안감을 표현하고 꿈꾸는듯한 표정은 낭만적인 특성을 나타내는데 실제 그는 정치보다는 연애에 몰두했다고 한다. 참 훌륭한 초상화다.

프란시스코 데 고야의 <두 살이 된 루이스 마리아 데 시스투에의 초상>이다.

 

프란시스코 데 고야의 < 마리아나 발트슈타인의 초상, 산타 크루즈의 9번째 후작부인 (소판)>이다. 1797년.

모델은 에스파냐에서 가장 매력이 넘치는 여성 중 하나였다. 백작의 딸로 빈에서 성장해 1781년 빈에서 산타크루즈 후작과 결혼해 에스파냐로 돌아왔다. 열정적인 그녀는 다국적 애인들과 염문을 터트렸다. 화가는 전형적인 에스파냐 궁정 의복을 입고 당당하게 서서 보는 이를 향해 상냥하게 미소짓는 그녀를 요염하면서도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표현했다.

프란시스 데 고야의 <카르피오 백작부인, 솔라나 후작부인>이다. 1795년.

이 전신초상화는 고야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모델은 귀족일 뿐 아니라 에스파냐 역사와 민족성에 관한 문제를 다룬 교훈적인 희곡을 쓰는 작가이기도 했다. 이 백작부부는 고야의 이웃사촌이었다. 이 초상화는 마리아가 죽기 1년 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미 병세가 깊어져 죽음의 징후가 보이는 그녀의 연약한 모습은 기품 있고 우아한 회색 배경을 바탕으로 두드러진다. 특히 머리의 분홍 리본은 그녀의 분홍 뺨에도 비친다. 다소 불안한 눈빛은 화가와 관람자를 지그시 응시하고 있다. 이 그림을 그릴 당시 고야 자신도 병에 걸려 있었고 이후 청력을 잃었다고 한다.

후세페 데리베라의 <은둔자 성 바오로>이다. 1650년.

카라바조의 영향을 많이 받은 화가는 성바울을 묘사한 이그림에서도 갈색과 검은 색 만을 이용해 어둠을 한층 강화했으며 작품의 주제와도 조화를 이룬다. 서기 300년경 살았던 테베의 성 바울은 최초의 그리스도교 은자로 전설에 따르면 그는 젊었을 때 신에게 헌신하면서 고독하고 참회하는 삶을 살기 위해 이집트 사막에 틀어 박혔다고 한다. 갈가마귀가 매일 빵 한조각을 가져다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갈가마귀를 함께 그려 넣었다. 황홀경에 빠져 회개하는 성인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성 바울의 길쭉하고 수척하면서 거의 발가벗은 모습은 그림을 대각선으로 분할한다. 리베라는 성인을 이상화하지 않고 위엄과 노화의 징후까지 갖고 있는 인간으로 표현했다.

 

엘 그레코의 <두 경배자에 의해 추앙 받는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이다. 1580년. 

티치아노의 제자였으나 틴토레토의 영향을 많이 받은 엘 그레꼬는 오늘날에도 강한 매력을 발산하는 비범한 예술가였다. 톨레도의 히에로니무스 수도회를 위해 그린 이 그림은 이래에서 올려다 본 것 같은 극단적인 시각을 통해 강조되었고 십자가 위의 죽어가는 그리스도의 이상화된 모습을 볼 수 있다. 아래 성모와 성 요한 대신 두 경배자가 그려져 있고 그들의 관점에서 볼 수 있다.

 

후세페 데리베라의 <절름발이: 안짱다리 소년>이다. 1650년.

미술사에서 가장 특색있는 그림으로 내반족을 가진 거지 소년을 그렸다. 어깨에 목발을 얹고 왼손으로 지탱하고 있으며 구걸할 때 사용하는 라틴어 대문자로  글귀가 쓰인 큰 종잇조각을 들고 자신이 거지임을 대놓고 드러낸다. 그의 환한 미소는 그가 운명에 큰 불만이 없음을 보여준다. 리베라는 소년의 처한 불행의 상징이자 생활 기반이기도 한 기형적인 발을 의도적으로 전경이 배치했다. 그는 이 그림에서 사실주의를 능수능란하게 사용했고 소년의 태도에서 보이는 명랑한 분위기를 전달했다.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의 <어린 거지>다. 1645-50년.

무리요는 거리의 부랑아를 충격적이면서도 사람의 마음을 끄는 무언가를 더해서 그려냈는데 이 거지를 여러번 다양하게 그려냈다. 열살 가량의 누더기를 입고 있는 소년은 바닥에 앉아 있고 주변에 가련함을 강조하는 소품-질그릇 물병, 사과, 밀짚가방, 먹다 남은 새우 찌거기 등이 보인다. 창을 통해 거친 햇빛이 비치고  아이는 몸을 웅크리고 있다. 주제가 무엇이든 이 감동적인 그림은 일상생활의 솔직한 모습을 넘어 더 깊은 의미를 숨기고 있는듯하다.

루이스 에우헤니오 멜렌데스의 <습작 나체화를 들고 있는 화가의 자화상>이다. 1746년.

1745년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서 첫 상을 받은 다음해 주로 정물화를 그리던 화가가 젊은 예술가의 자신감을 드러내는 자화상을 그리고 최초로 서명을 남긴 작품이다. 멜렌데스는 생기 넘치는 태도로 초상화가로서의 재능도 입증해 보였다. 그의 옷, 특히 주름이 가득 잡힌 셔츠는 프랑스 로코코 취향에 들어맞으며 인물이 관람자를 똑바로 마주하는 정면자세는 동시대 프랑스 화가 루이 미셀 반로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머리카락을 보호하기 위해 두른 손수건은 예술가들이 입는 전통적인 작업복의 일부다.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의 <성모의 탄생>이다. 1660년

세비야의 대성당의 무염시테 예배당을 위해 그린 그림으로 무리요는 성모의 탄생을 친밀한 가족적 분위기로 표현하면서 초월적인 존재임을 나타내는 유일한 징후인 날아다니는 두 아기천사를 그림의 상부에만 그려 넣었다. 중앙의 아기 마리아에게 조명적으로나 구도면에서 중심이 되게 빛을 주고 잇다. 왼쪽 배경에는 어머니인 안나가 출산으로 지친 모습으로 마리아를 보고 있다. 신비한 명암 대비와 흐릿한 색 처리, 희미한 윤곽 등 렘브란트의 화풍을 잇고 있다.

후안 카레뇨의 <성 삼위일체 수도회의 미사>다. 166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