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미술관/드레스덴 고전회화관

드레스덴 고전회화관 3

boriburuuu 2020. 9. 24. 21:07

안톤 그라프의 <젊은 자화상>이다. 1765년.   1766년 29세의 스위스 예술가 그라프는 드레스덴에서 법원 화가로서의 지위를 신청한 것을 지원하기 위해 이 자화상을 제출했다. 작가는 아직 비어 있는 캔버스 앞에 앉아 젊고, 대담하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여준다. 특징은 그의 경고 눈이다 날카로운 눈으로 그라프는 피사체의 영혼이나 본질을 포착하려 애썼고, 단순히 외모를 재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안톤 그라프의 <58세의 자화상>이다. 1794-95년.  드레스덴 법원 화가 그라프(Graff)가 약 80개의 자화상을 선보인다. 여기서 그는 단순히 가구가 비치 된 방에서 중년의 자신을 보여주는데 배경의 녹색 커튼만이 그가 이제 매우 인기 있고 성공적인 초상화가 되었음을 시사한다. 특이한 것은 앉아있는 작가가 의자 나머지를 보는 사람에게 넘겨주는 것인데, 그는 밀접하게 관찰하는 것 같다. 그의 눈은 컬러 팔레트와 브러쉬만큼이나 필수적인 도구임을 증명한다.

안톤 그라프의 <50세 여성의 초상화>다. 1795년.

안톤 그라프의 <마리아 조세파 폰 칼로비치>,<칼 아돌프 폰 칼로비치>다. 1805년.  칼 아돌프 폰 칼라위츠는 1786년부터 색슨 군대에서 복무했으며, 이후 러시아 차르 알렉산더군대에 합류했다. 1805년, 초상화 당시 칼라위츠는 색슨 군대의 유니폼을 입고 있다. 배경에는 색소니 의 리브스타트에 있는 그의 저택 슐로스 쿠크스하임이 있다. 18세기의 영국 초상화 전통에 대한 반향을 가지고 있지만, 개별적으로 대우받고 있다. 상대방은 묘사된 것과 주변 환경 사이의 서정적인 조화를 이룬다. 묘사 된 두 사람과 친구였던 하인리히 폰 클레스트리스트는 1807년 울리케 폰 클레스트리스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나라에서 가장 부유한 참여자 중 한 명"이라고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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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은 리가우드 히아신테의 <삭센의 선거인 아우구스투스>다. 1714년.  오른쪽은 루이 드 실베스트레의 <말을 타고 있는 폴란드의 왕>이다. 1718년.

왼쪽은  루이 드 실베스트레의 <삭센의 선거인 아우구스투스의 승마>다. 1718년.    오른쪽은 <색소니의 마리아 조세파 스파 공주>다.  1719년.

 

 

폴 헤르만의 <징벌>이다.

발다사르 페르모세의 <그리스도의 깃발>이다.

니콜라스 푸생의 <경배 받는 성모자>이다.

니콜라스 푸생의 <플로라의 세계>이다.

클로드 로레인의 풍경화다.

벨로토 베르나르도 카날레토의 <아우구스투스 다리 아래 엘베의 오른쪽에서 본 드레스덴>이다. 1751-53년. 다리를 건너가보니 이 풍경을 볼 수 있는 곳에 사각형의 액자를 만들어 놓았다. 전쟁으로 파괴된 후 복원했지만 거의 변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카날레토의 <베로나에 있는 예 폰테 델레 나비>다. 드레스덴으로 향하기 전에 벨로토는 1745년 토리노와 베로나 등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에서 일했다. 베로나의 이 대작은 14세기에 지어진 아디게를 가로지르는 다리를 보여준다. 벨로토가 머무은 지 불과 10년 만에 홍수로 파괴되었다. 작가는 도시의 일상생활과 건축을 자세하게 전달한다. 그는 종종 베두테의 여러 버전을 만들었다,

카날레토의 <아우구스투스 다리 위의 엘베 오른쪽 둑에서의 드레스덴의 풍경>이다. 1747년. 벨로토의 첫 번째 드레스덴 베두테는 그가 도착한 해에 만들어졌다. 구시가지의 실루엣을 보여준다. 왼쪽에는 브룰 총리의 건물이 벽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프라우엔키르슈 브룰스 젬멜데갈리 아래, 도서관, 정원 홀, 궁전이 뒤따른다. 오스만스투르름은 공사 중인 대성당 옆에 있다. 오른쪽에서 작가는 "Canaletto"라는 단어로 서명했다.

카날레토의 <드레스덴의 전 크로우스키르체>다. 1751-52년.

카날레토의 <시가세에서 드레스덴의 올드 마켓>이다. 벨로토는 드레스덴의 올드 마켓의 두가지 전망을 그렸다. 여기서 그는 주간 시장에서 조밀한 군중을 보여준다. 이 베두타 덕분에 시장 광장이 권위있는 햄버거 하우스로 둘러싸인 방법을 볼 수 있다. 오른쪽에는 프라우엔키르슈의 돔이 있으며, 왼쪽에는 가톨릭 법원 교회의 탑이 슐로스가세 위로 솟아 오른다. 남쪽을 바라보는 시장 광장의 펜던트 뷰에서 화가는 옛 크로이츠키르체(갈)의 탑의 모습을 기록했다.

카날레토의 <피르나의 시장 광장>이다. 1753-54년.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건물들은 피르나의 중요성을 증언한다.
시장 광장의 중간에 마을 회관이다. 그것은 화재 후 1581 년에 복원되었다; 우아한 타워는 171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경에는 시청과 인접한 무게집이 있다. 오른쪽에는 선거구 사무실과 나무 파이프를 통해 샘물이 공급되는 물 통도 있다. 시장 광장 뒤에는 성 마리아 교회의 탑이 올라가고 고원지대에는 소넨슈타인 요새가 보인다.   

스위스 화가 장 에티엔느 리오타르의 <쵸콜릿 소녀>다. 리오타르는 스위스 출생이지만 유럽전역과 터키에서 활동을 많이했다 .특히 터키여행시 그린 그림들은 그의 초상화들과 함께 아주 인기였으며 그는 직물묘사에 뛰어나 섬세한 레이스,실크,모피 표현에 능숙했다. 초콜릿은 둘째치고 복숭아빛 뺨이랑 뽀얀 피부가 정말 사랑스러운데 이건 파스텔그림이다. 캔버스나 판넬위에 손질한 양피지를 붙여서 파스텔로 그렸다. 스페인. 이탈리아에선 아침에 진한 초콜릿차를 마셨다고 하는데 요즘처럼 달콤한건 아니고 쌉쌀한 초콜릿차! 깨끗한 물 한잔과 초콜릿차를 들고가는 하녀임에도 고운 손을 가진 소녀, 전해지는 얘기로는 어느 귀족이 저 소녀를 보고 반해버려서 청혼을 하고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에 골인했다는 드라마 같은 일화가 있는 그림이다. 소녀의 이름은 애나라고 전해진다. 너무 아름다운 그림이어서 이 미술관에서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었다.

요한 엘레아자르 세나우의 <선거 색슨 가족>이다. 1772년. 그림이 풍부한 가족 사진은 일렉트로레스 - 위트 마리아 안토니아의 회복을 계기로 만들어졌다. 예술가로 일하기도 하면서 그림을 의뢰하기도 했다. 그녀는 아이들과 친척들 가운데 의자에 흰색 드레스를 입고 앉아 있었는데, 그의 초상화는 셰나우가 꼼꼼하게 포착했다. 엘리자베스 공주는 일렉트레신의 회복에 관한 그림의 큰 그림을 가리킨다.

맹스 안톤 라파엘의 <빨간 코트를 입은 자화상>이다. 1744-45년.

맹스 테레사 콩코르디아의 <자화상>이다. 1733-4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