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미술관/런던 내셔널 갤러리

르노와르와 클로드 모네.

boriburuuu 2020. 11. 27. 14:23

오귀스트 르노와르의 <마리아 세르트>다. 1904년.  이것은 20세기 초에 프랑스에서 가장 높은 예술계의 사랑이었던 네 고데브스카 미시아 세르트의 초상화다. 그녀가 얼마나 매력적이고 영향력이 있었는지를 과장하기는 어렵다. 지역 신문들은 그녀를 '파리의 여왕'이라고 불렀다. 재능있는 피아니스트인 그녀는 도시에서 가장 유명한 예술가, 작가 및 음악가와 관련이 있으며 로트렉, 보나르및 빌리아드 등이 그녀의 초상화를 그렸다. 르누아르는 그녀의 초상화를 7, 8번 그렸는데, 각각 한 달 동안 일주일에 3일씩 앉아 있어야 했다. 이것은 가장 잘 알려진 것 중 하나이다. 그녀가 32살이 되어 첫 남편과 이혼한 해인 1904년이다. 르누아르는 그녀의 빛나는 화려함과 침착함뿐만 아니라 아마도 그녀의 감정적인 혼란의 무언가를 포착했다. 그녀는 아직 우리에게 초점을 맞추지 않은 시청자를 직접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오귀스트 르노와르의  <호숫가 풍경>이다. 1889년.  이 그림의 반대에 대한 설명은 프랑스의 오트 사보이 지역의 큰 호수에 인접한 중세 도시인 안시 근처의 풍경으로 확인된다. 그러나 정확한 위치는 확인되지 않았다. 르누아르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강한 색상 조합을 사용하여 색소의 진동과 강도를 높이기 위해 붉은 색(핑크, 오크레, 녹)의 대조적인 색조로 밝은 녹색을 상쇄했다. 여기서 그는 또한 우리가 거리를 볼 때 경험하는 광학적 효과를 반영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 가까이 있거나 주변 시야에 있는 것, 즉 이 경우 전경 양쪽에 있는 풀과 잎은 우리의 눈이 그 너머를 볼 때 초점이 맞지 않는다. 르누아르는 시청자에게 더 자세히 그림을 그리는 대신 브러시의 넓은 잽을 사용하여 흐릿한 인상을 만들어 눈을 속여서 그림을 더 깊이 들여다보게 했다. 

 

오귀스트 르노와르의 <우산들>이다.  1885년. 이 그림은 우리를 전경을 가득 메운 6명의 주요 인물들에 가까운 번화한 파리 거리에 배치한다. 그들 뒤에 있는  군중은 저 너머의 대로를 거의 완전히 차단한다.,사진의 상위 4분의 1은 대부분 적어도 12개의 우산으로 된 캐노피로 채워져 있다. 각 단계마다 약 4년의 간격을 두고 두 단계로 그려진 이 작품은 1880년대 르누아르의 예술이 인상주의에서 벗어나 고전주의 예술로 나아가기 시작한 변화를 보여준다. 어머니와 두 딸, 그리고 중앙에 프로파일링된 여성이 포함된 오른쪽의 그룹은 풍부한 발광 톤의 섬세한 깃털 같은 터치로 특징적으로 인상주의적인 방식으로 그려진다. 두 번째 단계에서 완성된 구성의 왼쪽에 르누아르는 보다 선형 스타일을 채택했다. 전신 젊은 여성과 그녀의 뒤에 서 있는 남자를 포함한 이곳의 인물들은 윤곽과 정밀하게 그려진 특징, 그리고 더 큰 3다임 감각을 분명히 정의했다. 

르노와르의 <극장에서>다.  1876년.  우리는 두 명의 젊은 여자와 함께 극장 안에 앉아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확신할 수는 없다. 무대도 보이지 않고 여자들 중 한 명이 우리를 외면하고 있다. 보닛의 뒷면이 다른 사람의 얼굴을 대부분 가리고 있다.이 신비감은 가까이 있는 여자의 자세에 의해 강화되고, 뭔가 그녀의 관심을 흡수하는 것처럼 약간 앞으로 기울어진다. 그녀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무대 공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19세기 파리에서 극장에 참석한 것은 쇼를 보는 것만큼 사회적 지위에 관한 것이었다. 우리는 이 사진에서 사람들이 보는 분위기를 강하게 느낀다.,배경의 청중들 사이에서는 하층부의 남자와 그 위에 있는 여자가 눈에 띈다.,그들은 우리, 시청자, 또는 상자 안에 있는 젊은 여자에게 눈을 돌리고 있는 것 같다

클로드 모네의 <수련>이다.  1899년.  1893년 모네는 지베르니에 있는 그의 집 옆에 있는 땅 한 줄거리를 샀다. 그는 이미 화려한 꽃 정원을 심었지만, 지금은 '눈의 즐거움과 페인트칠을 할 피사체를 위한 것'을 위해 물 정원을 만들고 싶었다. 그는 기존의 연못을 확대하여 이국적인 새로운 하이브리드 수련으로 채우고 한쪽 끝에 혹등 다리를 만들었는데, 일본 인쇄물에서 볼 수 있는 예에서 영감을 얻었다. 물 정원은 모네의 후기 경력의 주요 강박 관념이 되었고, 약 250점의 그림의 주제가 되었다. 여기서 다리는 캔버스의 폭에 걸쳐 있지만 가장자리에서 차단되어 물 위로 둥둥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모양은 그림의 하단에 있는 어두운 호수에 반사된다. 마치 우리가 다리를 올려다보지만 거리를 향해 떠다니는 수련을 내려다보는 것 같다.. 

모네의 <석양의 수련>이다. 1907년.  그의 생애 마지막 20년 동안 모네는 지베르니에 있는 그의 집에서 만든 물 정원을 그리는 데 전념하여 약 250개의 혁신적인 캔버스를 제작했다. 그의 그림은 물과 단풍과 구름의 반사를 변화시키면서 빛의 미묘한 변조에 집중하기 위해 연못의 둑, 일본 다리, 전통적인 수평선에 대한 묘사를 점차 포기하면서 점점 더 실험적이 되었다. 이 그림에서 시청자를 앉히는 데 도움이 되는 유일한 힌트는 은행의 대략적인 위치를 나타내는 왼쪽 하단 모서리에 있는 식물 덩어리다. 지는 해의 분홍색과 노란색 광선이 연못에서 반짝인다. 우리의 시력은 물의 표면과 연못의 깊이 사이에서 진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수평 백합 패드와 울고 있는 버드 나무의 어두운 수직 반사 사이에.

모네의 <아이리스> 다. 1914-1917년.  아이리스는 모네가 가장 좋아하는 꽃 중 하나였고, 그는 여러 종을 재배하여 꽃밭과 물 정원에 심었다. 이것은 모네가 1914-17년경에 그린 백합 연못의 둑을 둘러싼 약 20개의 전망 또는 홍채 중 하나다. 마치 우리가 일본 다리 위에 서서 꽃으로 둘러싸인 구불구불한 길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다. 그 그림은 분명히 빠르게 그려졌는데, 정원의 길이 먼저 놓여 있고 꽃 테두리가 가장자리를 넘어 효과가 있었다.하얀 땅은 곳곳에 드러나 있고 붓놀림은 느슨하며, 두꺼운 보라색, 블루스, 그린은 대담하고 조잡한 스트로크로 발라져 있다. 그 효과는 부분적으로 이중 백내장의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이 결과는 이 날짜에 모네의 시력을 바꾸고 있었다. 이 사진이 그의 죽은 후에 그의 스튜디오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이 화가가 이 그림을 완성된 것으로 간주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모네의 <생 나자르역>이다. 1877년.  이 그림은 모네가 1877년 초에 그린 나자르역 십여 개의 풍경 중 하나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역을 알고 있었고, 파리 서쪽의 주요 인상파 사이트 중 많은 곳으로가는 열차 터미널이기도했다.
그룹의 덜 완성된 그림 중 하나인 모네가 역 자체에서 만든 네 장의 그림 중 가장 자유롭게 그려진 그림이다. 그는 주요 선 중 하나의 종착역에 자리를 잡고 플랫폼을 건너다보았다.,전경에는 두 대의 기관차가 증기로 뒤덮여 있고 아마도 탑승을 기다리는 승객들에 둘러싸여 있을 것이다. 지붕의 거더의 어두운 각선은 증기와 연기에 의해 형성된 무작위 패턴과 대조된다. 사진 상단에 닫힌 지붕을 포함시킴으로써 모네는 풍경의 관습을 거꾸로 뒤집었다. 열린 하늘과 관련된 빛과 구름은 유리와 철로 만들어진 뚜렷하게 현대적인 구조 안에 포함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