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이스라엘

열아홉번째(12.12) 국경 넘어 하이파로

boriburuuu 2017. 1. 3. 12:12

성수기는 아니었지만 이스라엘 국경을 넘는데 까다롭고 힘들며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여행기를 수없이 읽은 터라 우린 많은 사람들이 넘는 알렌비 국경이 아닌 북쪽 벳샨 국경을 넘기로 했다. 그런데 택시 운전수가 먼 벳샨 국경이 아니라 가까운 알렌비 국경으로 간다는 것이었다. 나는 안된다며 약간의 실랑이를 한 끝에 25원에 국경까지 가기로 했다. 전에 만났던 여자분이 그 정도 금액이면 간다고 했던 말이 생각나서다. 마다바에 산다는 이 남자는 쉬는 날에 일부러 왔는데 캔슬이 되면 안된다고 해서 절충한 것이다. 국경 앞에 도착하자 안으로 갈 수 있는 택시로 바꿔 탔다.(1.5원) 중간에 캐리어는 들어주는 남자 팁1원, 출국세를 10원씩 내고 들어갔는데 이스라엘 검문소까지 넘어가는 버스비가 1원이었다. 생각지도 않은 지출에 디나르가 부족해서 13달러를 디나르로 환전했다. 역시나 이 국경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입국도 간단했다. 짐 검사를 하고 몇가지 질문을 한 다음 바로 새 비자를 주었다. 밖으로 나오니 한 남자가 택시를 합승하란다. 올 때 하이파까지 택시비가 300세켈이란 것은 알고 있었는데 이 안에서는 360이었다. 합승이니 240세켈을 내란다. 아님 벳샨까지 50세켈을 내라고 하는데 이 남자의 자세가 기분 나쁘기도 하고 50세켈이면 합승도 필요 없고해서 거절을 하고 나니 또 막막해진다. 언니는 당황해서 머리끝까지 열이 올라온 기색이다. 다음차가 오면 하이파까지 합승할 사람이 올지도 모른다고 기다리다가 택시를 콜해야하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분위기가 안 좋아졌다. 그러던 중 한 남자가 나왔다. 어디로 가느냐, 택시가 필요하지 않느냐고 하니 밖에서 자기 친구가 택시운전수인데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나가보니 택시들이 서 있었다. 그 남자는 예루살렘으로 가니 합승이 안되고 다른 택시를 타려고 하는데 머리가 하얗게 센 할아버지 운전수가 기차가 시험 운행중인데 무료라는 고급정보를 주셨다. 50원을 주고 기차역으로 가니 무료는 아니었고 시험운행 3개월간만 5원을 받고 운행하고 있는 것이었다.

<기차 밖 풍경>


<농장에 물 공급하는 모습>

<기차 노선도>

쾌적하게 기차를 타고 하이파에 도착했다. 집주인 하무디가 동영상을 보내 주었는데 열리지가 않아 앞에서 택시를 탔다. 그런데 이 운전수가 우릴 엉뚱한 곳에 내려준 것이다. 43번지의 9호라는 것을 9번지에 내려주는 바람에 우린 집을 찾느라 무지 고생을 했다. 나중에 보면 아무것도 아니고 찾기도 쉬운데 처음에는 왜 이리도 힘든지 모르겠다. 집주인 하무디는 시간이 일러서 체크인은 할 수 없으나 집은 맡아줄 수 있다고 해서 우린 시내구경에 나섰다. 먼저 바하이 사원에 갔다.바하이 사원은 세계문화유산이다.  바하이교에서 정원은 평화를 얻을 수 있는 곳을 상징해서 바하이교 성전이 있는 곳에 반드시 정원이 있다. 그리고 바하이교에서 제일 중요한 성지인 하이파여서 바하이교 정원 중에서 최대 규모의 정원을 만들었다. 정원은 모두 19 단계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바하이교 창시자인 바하이울라의 18제자와 바하이울라 자신을 상징한다. 카르멜산은 폭이 8㎞, 길이가 39㎞이며, 가장 높은 곳의 해발이 525.4m이다. 카르멜은 신의 장원(God's vineyard)이라는 뜻이다. 그래선지 이곳의 지하에서는 고대 포도주와 오일 제조시설들이 발굴되기도 했다. 그리고 카르멜산은 이스라엘에서 삼림이 가장 잘 가꿔진 지역이다. 참나무, 소나무, 올리브, 월계수가 많다. 카르멜산은 종교적으로 성스러운 땅이고 전략적으로 선점해야 할 땅이다. 기원전 15세기 이집트 파라오 투트모스 3세에 의해 이 지역이 처음 언급되고 있다. 성경 '열왕기'에는 카르멜산에 신을 위한 제단이 설치되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특히 예언자 엘리야(Elijah) 이야기가 유명하다. 열왕기 '카르멜산 위에서의 대결'(열왕기상 18장 20-40절) 부분을 보면, 엘리야가 이곳 제단에서 바알(Baal)신을 믿는 사람들과 겨뤄 그들을 이겼다고 되어있다. 그리고 바하이 정원 안에는 영묘, 행정청, 문서보관소 세 개의 건물이 있는데, 그 중 황금빛 돔이 번쩍이는 영묘가 눈에 띈다. 하얀 기둥과 벽에 황금색 돔을 얹은 로코크 양식의 건물이다. 이 건물은 1891년 압둘 바하(`Abdu'l-Bahá)에 의해 지어지기 시작해 그의 손자 쇼기 에펜디(Shoghi Effendi)에 의해 완성되었다. 그리고 2008년에서 2011년까지 내외부에 대한 보수공사를 마쳐 현재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 같은 관광객들은 이 정원의 일부만 볼 수 있다. 정상부에서 아래로 계단을 4~5층 내려가는 정도만 개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원이 대칭으로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지만, 들어갈 수 없으니 그림의 떡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바하이 정원을 찾는 것은 이곳이 최고의 전망 포인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시 바하이 정원을 내려와 산중턱에 있는 아래쪽 정문으로 가 보았다. 역시 문을 개방하고 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곳에서는 계단을 통해 바하이 영묘를 올려다 볼 수 있게 되어 있다. 여기서 보니 바하이 정원이 숲, 계단과 건물, 물의 삼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대칭이 더욱 뚜렷하고 물에 의한 반영도 좋다. 아래로 내려다보는 하이파 시가지도 아주 단정해 보인다. 그러나 이곳도 역시 4~5층 계단 이상은 올라갈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에 있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하나를 봤다는 사실에 만족하기로 한다. 하이파는 바하이 영묘가 있어 보수적일 것 같지만, 이스라엘에서 가장 진보적인 상공업도시이다. 인구도 시내만 26만 8000명이고, 주변지역까지 포함하면 60만 명쯤 된다. 이곳은 또한 유대인의 비율이 전체 인구의 90%나 된다. 그 중 1/4이 과거 소련으로부터 이주한 유대인이다. 이스라엘에는 구소련으로부터 이주한 유대인이 많아 러시아어를 쓰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래서 이스라엘에는 러시아어 방송까지 있다.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정신적인 수도고, 텔아비브가 정치와 행정의 수도라면, 하이파는 경제와 무역의 수도이다. 금빛 돔, 이태리 풍 대리석 벽, 그리고 화강암 기둥으로 지어진 이 사원은 1953년에 지어졌고, 하이파에서 가장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40m의 높이의 돔은 1만 4천 개의 금도금 벽돌로 덮어져 있다. 이 사원에는 세계 9대 종교를 나타내는 9개의 면이 있다. 대법원과 바하이교 기록물 보관소를 포함하여 그 외 독특한 건물들이 주위에 몇 개 있.

바하이교는 1844년 이란의 쉬라즈에서 출발한 종교운동이다. 1852년까지 이란 전역으로 펴졌고, 찬디예(Zandijeh) 왕조시대 카림 칸(Karim Khan)으로부터 탄압을 받자 지하에서 그리고 키프로스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바하이교의 창시자는 시이드 알리 무하마드(Siyyid `Alí Muhammad Shirazi)이다. 그는 이슬람 시아파 출신으로, 시라즈의 상인이었다. 그는 이슬람의 메시아 사상을 거부하고 신의 새로운 사자, 무하마드의 숨겨진 이맘(the Hidden Imám of Muhammad)을 찾으려고 했다. 그는 새로운 진리와 예언을 찾아 나섰고, 새로운 종교시스템을 구축했다. 그리고 자신을 시아파 무슬림의 메시아 같은 존재인 마디(Mahdi: 예언된 구세주)라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그 선언에 따라 그는 자신을 밥(Báb: 진리에 이르는 문)이라고 불렀다. 1848년부터 1850년까지 밥을 따르는 바하이교 신자들이 10만 명 정도 생겨났고, 시아 무슬림과의 갈등이 생겨나게 되었다. 밥은 이슬람교를 배반했다는 죄목으로 기소되어 1850년 7월 9일 타브리즈에서 총살되었다. 며칠 동안 방치되었던 그의 시신은 바하이교 신자들에 의해 수습되어 테헤란 근교에 묻히게 되었다. 그 후 3년 동안 수비 아잘(Subh-i-Azal)이 바하이교의 수장이 된다. 그러나 그의 지도력이 의심을 받아 1853년 바하울라(Bahá'u'lláh: 1817-1892)가 신의 사자(Messenger of God)라는 이름으로 바하이교를 이끌게 된다. 바하이교에 대한 탄압은 1850년대 중반 아미르 카비르(Amir Kabir) 수상 때 절정에 달했다. 1840년대 이후 20여 년간 2만 명 정도의 바하이교 신자가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하울라는 1891년 자신의 큰 아들 압둘 바하에게 자신의 영묘를 카르멜산에 세우도록 명했고, 그것이 손자 대에 와서야 완성되었다. 그 후 하이파의 바하울라 영묘는 바하이교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성지가 되었다. 1900년대 들어 바하이교 신자는 100만 명 정도로 늘어났고, 현재 전 세계적으로 500~600만 명 정도의 바하이교 신자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는 사원을 나와 갈멜산으로 가기로 했다. 그런데 운전수에게 물으니 사방 번화가가 다 갈멜산지역이란다. 당황한 우리는 버스에서 내려 서점에서 엘리야의 동굴이나 무후라카를 물으니 아주 멀어서 택시를 타도 오래 걸린다고 한다, 정신을 차리고 구글 검색을 해보니 엘리야의 동굴이 그리 멀지 않아 택시를 탔다. 아직 환전을 못해 떨면서 가고 있는데 카르멜 수도원을 지나 엘리야의 동굴로 데려다 주었다. 역에서 집까지 30원, 엘리야의 동굴까지 38원을 써서 깜짝 놀랐는데 그러고보니 우리가 예루살렘에서는 버스만 타고 다니고 렌트를 해서 이스라엘의 교통 물가를 통 몰랐던거다. 나중에 보니 이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엘리야의 동굴은 기원전 860년 아합왕의 아내 이세벨이 바알신을 퍼뜨리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엘리야가 왕에게 회개하지 않으면 기근이 들 것이라 예언 했고 몇 년간 기근 끝에 바알신과의 겨루기를 제안하여 여호와께 기우제를 지내 비가 오게 하여 바알신에게 승리했다.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려하자 도망해서 피신한 장소라고 알려져 있다.


<엘리야의 동굴 입구 건물>




<동굴 내부>




















<동굴 입구>


동굴을  둘러보고 수도원으로 가는 길을 물으니 너무 멀다며 택시를 타길 권유한다. 산을 빙 돌아서 오니 멀었지만 가로 질러서 올라가면 그리 멀지 않을 거란 확신에 1시간이라고 했지만 걸어 올라갔다. 10분 정도 걸으니 성모리아의 동굴이 나타났다  아기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것을 안 헤롯왕이 두 살 이하의 어린아이들을 모두 죽이라고 했을 때 에수와 가족들은 이집트(애굽)로 피난해야만 했다. 피난중에 갈멜산 중턱에 있는 동굴에 잠시 피신했다고 전해지는 곳에 세워진 교회이다. 현재는 입구가 잠겨 있어 밖에서 바라볼 수 밨에 없었다.

<오른쪽 위로 올라가는 계단>

<위에서 본 지중해>

<성모리아의 동굴>




<수도원 전경>



<하이파 전망대>

<전망대에서 본 해변>

수도원은 잠겨 있었고 교회 내부만 볼 수 있었다. 엘리야 선지자를 기념하기 위한 수도원으로 12세기에 세워졌다고 한다. 이 수도원에서는 어린아이들을 위한 세례식이 주로 베풀어지고 있단다. 내부의 성화에서도 엘리야와 관련된 것이 많이 눈에 띄었다.


<동굴위에 세워진 교회 전면>

<천정의 돔>














<동굴속 제단>








교회를 둘러보고 나왔는데 한 영국인 남자분을 만났다. 3시에 문을 연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란다. 30분 정도 시간이 남아 우리도 주변을 둘러보며 시간을 보내다 다시 왔는데도 문을 열지 않는다. 기념품 상점에 물으니 지금은 개방하지 않는 중이라고 해서 그 남자에게 환전소를 물으니 두 군데가 있다고 알려준다. 그분과 같이 내리막길을 걸어 30분쯤 오니 우리 동네가 나왔다. 사실 가까운 거리를, 모르니까 막막해서 버스에 택시를 타고 헤멘거다. 바하이 사원을 보니 참 반갑다. 사원 아래 바닷가까지 이어지는 도로는 온통 레스토랑과 호텔 등이 모여있는 번화가이다. 그 곳에 환전소가 있었는데 영국 남자분이 앞까지 안내해주고 가서 쉽게 환전을 할 수 있었다. 항상 돈이 두둑해지면 행복지수가 올라간다. 우리는 버스 정류장도 확인하고 수퍼에 가서 야채와 맥주를 사서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맥주 한병이 12원, 15원이란다.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5,000원 가까이하는 것이다. 역시 이스라엘의 물가란. 수퍼에서 이 정도이니 레스토랑에서는 더 심하겠지.








이른 저녁을 먹고 우린 야경을 보기 위해 집을 나섰다. 여긴 벌써 크리스마스 기분이 한창이다. 바하이 사원에서부터 바닷가까지 이어진 1킬로 이상의 도로가 조명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우린 사진도 찍고 구경도 하면서 이 분위기를 즐겼다. 사실 마음속으로는 그 중 가장 화려한 가게에 앉고 싶었다. 그러나 가장 최소한의 경비를 지향하는 우리로서는 생략할 수 밖에 없었는데 여행기를 쓰는 지금도 아쉬운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