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미술관/베를린 구 국립미술관(알테)

칼 프리드리히 쉥켈

boriburuuu 2020. 10. 11. 12:34

칼 프리드리히 쉥켈의 <몽블랑의 전경>이다. 1813년.  쉥켈은 독일 출신의 신고전주의 또는 낭만주의 건축가이며 가구 디자이너이다. 프리드리히 길리의 건축과 그림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1809년 독일 황제 빌헬름 3세 궁전의 실내 장식과 가구를 디자인을 하는 등 주로 황실과 귀족을 위한 신고전주의 양식의 실내장식과 가구 디자인을 많이 했다. 1819년에는「 기술 위원」 의 창립회원이 되었다. 이탈리아로 여행하면서 쉥켈은 알프스를 건너면서 몽블랑으로가지는 못했지만 그 유명한 봉우리를 보았다. 자유롭게 그려진 그림은 다양한 풍경 요소를 보여준다. 왼쪽에 있는 3개의 나무 집이 있으며, 오른쪽에는 강이 폭포로 흐른다.

칼 프리드리히 쉥켈의 <고딕 수도원 유적지와 나무들>이다. 1809년. 그의 경력 초기에 쉥켈이 베를린에서 삽화와 파노라마의 공개 전시회로 관심을 끌었을 때, 그의 초기 기념비적인 그림 중 하나다. 쉥켈은 과거의 시대와 나무의 건축 모티프가 함께 있는 남부 풍경의 파노라마를 묘사한다. 왼쪽에는 고대 식물이 자라는 무덤 기념물이 있으며, 나무 뿌리는 기초를 파괴하겠다고 위협한다. 그림의 중심에 있는 기둥은 중세 유적지다. 두 명의 여행객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풍경을 가로지른다. 오른쪽 가장자리에는 기사의 무덤과 반 숨겨진 고딕 양식의 돔의 두꺼운 나무 나무로 풍부하게 자란 무덤이 있다. 건축 작품에서 자연의 영적 완성에 대한 낭만적인 아이디어가 표현되는 이 모티프는 1년 후 그의 석판화 "나무 뒤에 있는 돔"에서 다시 시작된다.

칼 프리드리히 쉥켈의 <아침>이다. 1813년.   러시안 육군 원수인  네이드 하르트 백작의 요청에 따라 쉥켈은 그림 쌍 "The Morning"과 "The Abend를 만들었다.  그는 두 개의 큰 펜 그림을 통해 하루의 동기를 다루었다. 쉥켈의 "The Morning"에서 두 명의 르네상스 의상이 아이들과 함께 너도밤 나무 숲으로 향하는 여성을 묘사한다. 따뜻하고 여름이 밝아진 아침의 빛은 이미 태양이 서 있는 무성한 나무의 현관을 통해 흘러 들어간다. 너도밤 나무 아래에는 아이들이 풀밭에서 놀고 숲의 오른쪽 가장자리에는 두 명의 기병이 나타난다. 전경의 왼쪽에 있는 고대 식물에 의해 자란 건축 조각을 통해 멀리서 볼 수 있다. 바다는 지평선으로 뻗어 있으며, 해안에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스타일의 화려한 돔이 있는 도시가 있다. 이 그림은 다양한 역사적 언급을 가지고 있다. 과거의 위대한 시대를 되짚어 보면서  이 역사적인 풍경에서 독일의 사회 갱신에 대한 비전을 드러낸다. "The Morning"은 애국적인 출발 분위기를 전달한다.

칼 프리드리히 쉥켈의 <물가의 고딕 성당>이다.  1813년.  고딕 대성당은 물속에서 가장 중요한 이미지 발견 중 하나다.쉥켈은 "그림에서 매우 시적인 방식으로 선택된 조명의 유형에 의해 완전히 놀라운 효과를 내었다"고 회상했다. 프라하, 밀라노 및 쾰른에서 본 모델을 반영하여 대성당 건물에 대한 그의 묘사에 통합했다. 기념비적인 기념물처럼, 화려한 나무로 둘러싸인 4 탑 고딕 대성당은 물로 둘러싸인 바위의 거대한 위에 돌출되어 있다.  태양은 시청자가 돌린 서쪽 외관을 비추고 있다. 거의 실질적인 빛은 건물의 일산 구조를 깨는 빛으로 보인다. 전경에 있는 요새화된 해안선에 선원들이 접근할 수 있다. 다양한 시대의 건축 요소로 도시에 대한 이상적인 개념을 제공했다. 

운브칸터 쿤스틀러의 <필그림의 전경>이다.

칼 프리드리히 쉥켈의 <강 가에 있는 중세 도시>이다. 1815년.  프러시아는 1813년과 1815년 사이에 프랑스의 외국 통치에 반대했다. 자유 운동이 계몽된 독일 국가를 형성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사회 갱신의 이상을 위해 낭만주의 예술가들은 독일 중세 시대에 하나의 역사적인 기초를 발견했다. 뇌우 하늘 이전에, 쉥켈은 고딕 돔의 햇빛이 비치는 서쪽 외관을 대표했다. 북쪽 외관 타워의 꼭대기는 여전히 미완성이며,  Reichsadler가 있는 흰색 깃발을 휘두르고 있다. 건물은 스트라스부르와 랭스 대성당을 기념하지만, 특히 그 당시에는 미완성인 쾰른 대성당을 기념하기도 한다. 팔라티노에서 왼쪽으로 대성당 건물을 가로 지르는 중세 도시로 우회전하는 무지개가 있다. 아마도 프러시안 왕 프레드릭 윌리엄 3세의 승리 후 귀환에 대한 비유일 것이다. 

칼 프리드리히 쉥켈의 < 바다에 있는 바위에 있는 고딕 성당 >이다. 1815년.  이탈리아로의 첫 여행 동안 화가는  피란의 해안 마을을 방문했다. 바다에 위치한 대성당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2년 후 "해변의 바위에 고딕 교회"가 나타났다. 오른쪽에는 항구로 향하는 중세 옷을 입은 신사 그룹이 있다. 방금 그들은 1455년 할렌의 베츠 칼럼의 뼈를 모델로한 길가에 서있는 고딕 양식의 기념물을 통과한다. 바다에서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람이 불어오고 있는 것 같다. 물 위의 바위 위에는 마치 암석에서 자라난 것처럼 장엄하게 대성당이 세워졌다. 깊은 태양은 그 뒤에 숨겨져 있고, 빛은 필리그라 건물을 둘러싸고 있다. 쉥켈의 대성당 이미지는 자유 전쟁 중 독일의 정치 및 영적 상황을 반영한다. 이 기간 동안 예술가는 고대 독일 모티프와 고딕 양식의 건축 예술에 대한 선호도를 개발했으며, 당시 독일 출신으로 여겨졌다.

칼 프리드리히 쉥켈의 <스트림의 성>이다. 1820년.  칼 프리드리히 쉥켈과 클레멘스 브렌타노 사이의 예술가들의 경쟁은 하이델베르크의 성을 모델로 한 성의 본보기를 보여주는 이 작품의 원인을 제시했다., 

칼 프리드리히 쉥켈의<스트랄라우 근처의 > 다. 1817년.  베를린에서 발드혼 송풍기와 함께 수로 여행하는 것은 인기있는 시간의 흐름이었다.  베를린의 수평선에서 볼 수 있는 도시 실루엣이 있는 그림에서 배는 오른쪽에 있는 신비한 환상적인 해안가에 가든, 멀리 떨어진 도시에 가든, 여행은 어디로 갈 것인가는 불확실하다. 풍경의 전망에 제한되는 강력한 톤 아치는 일몰로 금박을 입은 하늘에 높은 크림을 제공한다. 조용한 물 표면에 있는 그 단계는 인상적으로 반영된다. 

 

칼 프리드리히 쉥켈의 <그리스의 헤이데이 안의 풍경>이다.

칼 프리드리히 쉥켈의 이다.

칼 프리드리히 쉥켈의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