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미술관/오르세 미술관

오르세 시슬리, 피사로

boriburuuu 2019. 6. 28. 19:26

알프레드 시슬리는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로  모네, 르누아르와 함께 야외에서 그림을 그렸다. 당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던 수준보다 더욱 다양한 색채와 소묘적인 양식으로 풍경화를 그렸다. 시슬레는 이름이 알려지게 될 무렵인 59세의 나이에, 암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다음은 시슬리의 작품들이다. <아르당퇴유의 판자 다리>다.

 

시슬리의 <시냇가에서의 휴식>이다.

 

시슬리의 <생 마르탱 운하 전경>이다.

 

시슬리의 <몰지의 보트 경주>다.

 

알프레드 시슬리의 <햇빛이 비치는 모레의 다리>다. 그는 1880년 모레 쉬르 루앙이라는 작은 마을에 정착해 20년을 살면서 주위 환경을 주제로 많은 그림을 제작했다. 모레다리도 여러번 그렸는데 1982년 그려진 이 그림은 물에 비친 마을의 모습이 마을과 강을 한데 묶어주고 있으며 강, 건물, 하늘이 대비되며 견고한 구성을 보여주고 인물은 작게 표현되고 있다.

 

시슬리의 <포르 마를리의 홍수>다. 센 강의 항구 포트 마를리가 1876년 봄에 범람했을 때 근처에 살고 있었고 홍수를 주제로 7점의 연작을 제작했으며 범람의 진행 과정에 따라 대기의 변화를 포착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소재의 물 위에 반사되는 빛의 표현 이외에도 하늘의 변화와 빛의 변화가 풍경에 가져오는 효과에 주목햇다. 시슬리는 영국 출신으로 앵글로 색슨의 기질과 영국 풍경화가 존 컨스터블의 영향을 받았으며 영국적 분위기를 갖고 있다.

아래 그림은 피사로의 < 마를리항 세탁장>이다. 까미유 피사로는 일각에서 인상주의의 창시자로 여겨지는 프랑스 화가로 1860년대 후반부터, 피사로는 인상주의 화가들 사이에서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세잔과 고갱이 스승이라 부를 정도로 큰 영향을 미쳤으며,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은 피사로를 숭배하기까지 했다. 퐁투아즈에 정착한 피사로가 자연과 농촌 풍경을 그리는 화가로 남았고 세잔과 교류해 그 영향을 받아 구조나 골격도 중시함으로써 구조적 인상주의로 불린다.

 위의 그림은 피사로의<에르미타쥐 언덕, 퐁투아즈>이고 아래 그림은 <퐁투아즈의 상드니 해안의 붉은 지붕-겨울>이다. 시골의 풍경에 매료되었던 카미유 피사로는 1866년 파리에서 30킬로 떨어진 센 강의 지류인 우아즈강가의 작은 마을 퐁투아즈에 살면서 다양하게 변화하는 풍경 및 마을의 전통적인 생활방식에 빠져들게 되었다. 전쟁으로 모네와 함께 런던을 찾아 컨스터블 등 영국 풍경화가들의 영향을 받게 된다.  아래의 붉은 지붕의 집에서 피사로는 집을 나무들 틈으로 얼핏 보이게하는 쉽지 않은 방법을 선택했다. 그러나 나무들은 관람자를 너머의 수많은 색채의 층으로 이동하게 하고 그림의 중심에서 그 다양한 색채의 층을 발견하고 구분하도록 이끌어준다. 이 그림을 그릴 당시 피사로는 자신의 양식을 재고하고 있었다. 분명한 것은 인상주의의 주요 관심사엿던 자연 속의 색채와 색조의 효과를 순수하게 기록하고자 했던 점이다.

피사로의 <소녀 목동>이다.

피사로의  <퐁투아즈, 에르미타쥐의 채소밭>이다.

피사로의 <가을 오전의 과수원 마당>이다.

피사로의 <벨기에의 노크교회>다.

피사로의 <사퐁밭 풍경>이다.

피사로의 <과수원 풍경>이다.

피사로의 <과수원 오후의 태양>이다.

피사로의 <하얀 서리>이다. 퐁투아즈 근처를 그린 것으로 첫 인상파 전시회에 출품한 5점 중 하나다. 이 그림은 겨울날의 특별한 순간을 잘 포착한 수작이다.

 

 

 

피사로의 <빨래를 너는 여인>이다. 여러 면에서 노동은 인상주의 회화에 중요했고 피사로에게 친숙한 주제였다. 도미에의 <세탁부>와는달리 이 그림에서 딸과 함께 빨래를 널고 있는 여인의 모습은 서민들의 삶에 대해 보다 긍정적이고 밝은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피사로의 <녹색 숄을 걸친 여인>이다.

<디에프, 뒤케슨 연못, 썰물, 아침 해>이다.

피사로의 <생 세베르, 루앙 항구>다. 1896년 열다섯점의 작품을 그렸는데 보이엘디오외 다리의 하류에 있는 부르스 부두에 정박되어 있는 배들과 강 건너편 생 세베 지역의 창고를 묘사하고 있는 두 점 중 하나다. 하나는 메트로폴리탄에 있다.

피사로의 <세느강과 루부르궁>이다. 시골만 그리던 피사로가 파리 등 도시를 그리기 시작했으나 번잡함 때문에 어려운을 겪던 중 조용한 장소를 물색했는데 이곳이었다. 그는 1900년 시테섬으로 이사하고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려 70세에 30여점의 센강과 루브르궁 30여점을 남겼다. 이 그림은 그가 사망한 1903년에 제작된 것으로 그가 자신의 작품 중 최고라고 인정할만큼 큰 애착을 가졌던 작품이다.

피사로의 <루부시엔느의 길>이다. 1860년대 후반 카미유 피사로는 루브시엔 지방에 잠시 머물게 되었다. 이전에 퐁투아즈나 몽모랑시에 머물 때에도 그랬지만, 루브시엔의 시골 풍경은 피사로에게 많은 회화적 영감을 제공했으며, 1869년부터 그는 이곳 풍경을 자주 화폭에 담았다. 또한 이 즈음하여 그는 전원 풍경화 작업을 통해 다양한 회화적 기법들을 집중적으로 시도했는데,이 때부터 그의 작품 속에서는 로코코 화풍의 영향이 거의 사라지기 시작했으며, 작품 활동에 있어서 ‘수습기’를 지나 ‘성숙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특히 피사로의 풍경이 갖는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풍경 속에 어우러지는 ‘움직임’을 표현했다는 점이다. 그는 “자연이 보여주는 운동감이 바로 ‘분위기’이다.”라고 주장했는데, 이렇듯 미세한 운동감이 녹아 있는 그의 풍경화들은 마치 살아있는 것과 같은 생동감과 독특함을 관람객들에게 전달해 준다. 그가 자연 속의 ‘움직임’을 표현함에 있어서 간과하지 않았던 부분 중 하나는 인물이었다. 다른 인상주의자들과 달리 그는 풍경과 인물을 서로 개별적인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 작품에서도 마치 우연히 나타난 것처럼 풍경 속에 사람들이 등장하고 있다. 이렇듯 그는 풍경과 함께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는 사람들의 모습을 종종 작품에 담아내곤 했다.

피사로의 <루부시엔느의 도로-겨울>다.